2009년 07월 15일
REVIEW: 한국 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이하의 글은 이번 방학 중 홍대에 개설된 '현대미술 작가연구'라는 계절학기를 수강한 학생이 기말 페이퍼로 제출한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리뷰입니다. 성적을 내기 위해 기말 페이퍼를 읽던 중 이 학생의 글을 발견하고, 책의 저자로서도 무척 흥미롭게 읽었지만, 정작 제 머리와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아래 글이 무척 '독자적이고 정연하게' 읽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아주 튼튼한 글입니다.
중간중간 저자나 책에 대한 '공치사'는 스킵하시고, 이 글의 필자가 전개하는 사고의 논리, 만들어내는 글의 구조, 설득력있는 문장을 즐겨보시길!!
(학생의 동의 아래 글을 이 블로그에 전제하지만, 소속과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득불 익명으로 처리합니다. 혹시라도 '펌'하실 분이 있다면, 글의 필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존중해주시길. 이 필자는 현재는 예술이론을 전공하는 학생이지만, 언젠가 한국 미술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REVIEW : 한국 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1.
3주간 저자의 강의를 듣고, 이 한권의 책에 실린 비평들을 읽는 내내 와 닿은 것은 ‘비평가’의, 혹은 ‘비평가 강수미’의 어떤 자아(ego)이다. 각 작가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비평에서 독자는 감상의 길잡이를 얻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자의 비평적 자아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여기서 ‘비평적 자아’라 함은 비평 일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나 주장이기도 하고 저자의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이기도 하다. 이 글들이 월간지나 각각의 전시를 위한 도록 서문 등에 흩어져 있었을 때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 한데 모여 있기 때문에 새삼 저자의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게 된 것일 수도 있고, 당연하게도 각각의 글이 저자의 시각과 주관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 근거가 무엇이 되었든 이 기이한, 그러나 분명한 감상은 뚜렷하게 독자에게 전해지며, 엄밀히 말해 메타 비평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는 글들임에도 책 전반에 걸쳐 메타 비평적 성격이 감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각각의 비평들을 통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저자의 예술관과 비평관은 책의 서두와 말미의 <책의 정체>와 <책의 시점>, <책을 마치며>에서 저자 스스로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고 확인된다.
2.
서투른 감상자와 애매모호한 전공자의 경계를 부유하는 나에게 미술은 언제나 새삼스럽고 어려우며 조심스러운 대상이다. 특히나 실기 경력 없이 이론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미술 전공’이라는 수식어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은 상당히 부끄럽기까지 하다. 학부에서 4년 남짓, 충분히 공부하는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미술계라는 장의 한 언저리에서 고민하는 시간동안, 큐레이터라는 직함이 아무렇게나 쉽게 붙여질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넘치도록 알게 되었다. 더 알고 더 생각하고 더 공부할수록 소위 기획자, 큐레이터, 전공자, 이론가, 비평가, 학자 따위의 분명한 자리매김은 더욱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알아도 더 알아야하고, 생각해도 더 생각해야하며, 이해해도 이해한 것이 아닌, 쉽게 규정지어질 수도 없고 언제까지나 완성될 수도 없는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낭만주의적인 ‘천재’도 아닐뿐더러, 19세기 영국의 형식주의 이론가 클라이브 벨이 요구하는 ‘의미 있는 형식’을 감별해낼 만한 미적 감식력의 소유자도 아니므로, 작품을 마주하는 것은 항상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나에게 저자의 ‘비평하는’ 자아는 다소 의문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비평하고 기획하고 연구하고 미학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설명하는 것이 어렵고 곤란한 일은 아닐까. 나 자신과 저자의 입장부터가 절대적으로 비교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어쨌거나 같은 ‘이론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고민을 투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 어려운 미술과 어려운 미학을 겸손하다 못해 비굴한 자세로 떠받들어 온 나의 억압은, 마지막 저자가 책을 마치는 글에서 어느 정도 해소, 이해, 또는 해방된다. 나도 적어도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평등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전문 영역’, 소위 미술계라는 판의 경계를 나 또한 제멋대로 가로질러도 ‘괜찮다’는, 근거 없는 위안을 가져보는 것이다.
잔뜩 위축되어 미술계의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가 보려 하는 나에게 이 책은, ‘괜찮다’는 면죄부를 내어줄 뿐만 아니라 어떤 지도가 되어주기까지 한다. 작품 앞에서 막연히 시각 이미지를 무감하게 지나치거나, 스펙터클에 압도되거나, 작은 애정을 느끼거나 하지만 어떻게 이 암호와도 같은 형식 언어들을 해독하고 풀어나갈 것인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예술학과의 학부 커리큘럼에서 현대미술, 지금 이곳의 미술을 읽어나가는 것은 그다지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기보다, 세부전공으로 나아가기 이전의 기본적 소양이 되는 고대로부터의 미술사나 미학들을 천천히 짚어가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부지런한 감상자/해석자가 되지 못한 탓이 가장 크지만, 어쨌거나 나는 아직도 그림 ‘읽기’가 난처하다.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비평들과 저자의 강의는 나에게 작품 해석의 방법론을 제시하거나, 혹은 그 힌트가 되어준다. 무엇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자의 비평들이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 학문적 지식의 토대를 모태로 하여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상당히 자주 벤야민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주제가 벤야민 미학에 기초하는 것과 유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벤야민의 지나치게 유명한 개념에서부터 다소 생소한 단상들에 이르기까지 그 인용의 범주가 아주 포괄적인데, 이 각주들은 저자가 자신의 이론적 바탕을 자신의 삶과 사유에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흡수하고 생동케하고 있는가를 짐작하도록 하는 지표가 된다.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롤 모델이 되는데,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깊게 탄복할만한 세계관과 예술관을 만나,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삶의 방식으로 삼는 동시에, 예술작품을 마주할 때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해석의 틀로서 그 관념과 사유를 적용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미학/예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고, 삶에 있어서의 어떤 이상으로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의 비평들은 일차적으로는 어떤 관점에서 작품을 대할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그렇게 마주하여 어떻게 해석해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으로 다가온다. 개별 작가들에 대한 비평이 어째서인지 시각예술 일반과 비평 일반에 대한 사유의 방법적 틀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행동적으로 사유하는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실제와 유리되지 않고 온전히 용해된 삶의 태도를 견지한 개별 예술작품의 비평은, 오히려 비평 일반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를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비평 일반을 논하도록 독자를 이끄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저자의 비평들은 오직 그 사유의 틀과 방법론에 있어서만 의미를 갖는가? 그렇지 않다. 각각의 비평들은 어떤 인식을 건드리고, 활성화시키며 확장시킬 수 있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 몇 가지 방향성의 예를 들거나, 혹은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각 예술의 형식 언어 측면에서 기술복제시대와 상품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새로운 예술의 형식이 그 중 한가지다. 이는 비슷한 맥락에서 예술의 경계와 영역 확장의 주제와도 함께 읽혀진다. 꼭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의 논의가 아니더라도 기술복제시대의 새로운 예술 형식은 존재한다. 워홀 식의 실크스크린 복제뿐만 아니라 리히터와 같은 매체 활용, 몽타주 식 작업을 하는 작가나 미디어에서 소스를 가져오는 (김아영이나 박찬경 등의) 작가의 작업들까지도 모두 이 시대이기에 새로이 존재하게 된 형식을 내포한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곤잘레스-토레스의 복제되고 배포되어 향유되는 작업들까지도 기술복제시대의 새로운 예술 형식이자 새로운 감상 형식의 현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상의 서술은 저자의 동시대, 테크놀로지 시대의 예술이라는 커다란 화두에 대한 논의 면면을 나 스스로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살짝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저자의 해석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화두가 저자의 비평에 있어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 한 가지의 축은 공공성, 혹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유용성의 측면이다. 저자는 예술이 부조리한 삶의 일면에 변화의 힘을 가져올 것을 기대한다. 그 방식은 직접적이기보다는 잠재적이고, 노골적이기보다는 감춰진 형태의 저항으로서, 현실을 증상화하고 드러낸다. 식상하고 진부한 열성적 사회비판의 목소리보다 보다 고차원적으로 승화된 시적 언어의 예술 형식이 더 진실 되고 강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음을, 저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갖가지 갈래의 비평언어를 모두 아우르는, 가장 배후에 놓여있지만 가장 우선되는 전제이자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은 바로 미술에 대한 사랑이다. 미술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미술 비평이 가능한 것은 당연지사이겠으나, 이는 모든 전위적 미술현상을 추동하는 가장 일차적인 동인이 된다. 사회문화의 문제적 현상을 포착하고 드러내면서도 매체 권력의 획일화된 원리에 편승, 굴복하지 않는 새로운 예술 형식의 가능성을 믿는 것도, 고요한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예술의 힘을 믿는 것도, 모두 예술의 순수한 매혹의 힘을 믿기에 가능한 아방가르디즘인 것이다. 때문에 저자가 생각하는 예술은 상품가치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적어도 그 내적 완결성을 가진 형식 안에서만큼은 자체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 예술이다. (홍경택의 작품과 그에 대한 저자의 비평에서 이러한 예술관은 가장 잘 드러난다.) 그래서 저자의 글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동시에 낭만적이다. 차갑게 작품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분석해나가는 동시에 작품에 대한 가장 열렬한 애정을 담아낸다.
4.
다소 생각이 다른 지점들이 분명히 있겠으나, 나의 아직 완숙해지지 않은 거칠고 무지한 예술관은 저자의 관점과 어떤 영역들을 공유한다. 나 스스로가 서투른 감상자이자 몰지각한 이방인으로서 미술의 경계에 발 들이려 하기 때문에,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술이 향유되길 바란다. 나와 같은 이도 ‘미술을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작품으로부터 보다 고차원적인 쾌를 얻을 수 있다’라고 하는 미적 경험을, 미술을 멀게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상투적인 예술의 대중화와 하향평준화가 아닌, 상향평준화된 대중에 의한 예술 향유와 더 높은 수준의 미적 삶의 실천의 기대이다. 예술 감상에 의한 무관심적 만족은 감상자를 삶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순수한 쾌와 고양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는 삶에서 유리된 예술의 유미주의의 추구와는 다른, 삶과 결부된 예술의 진정성과 예술을 동반한 삶의 질적 향상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다. 실상은 별 것 아닌, 그러나 위대한 예술에 대한 찬탄. 때문에 나는 일상 미학과 예술의 대중적 향유를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하며, 예술을 경제적인 투자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일련의 경향들에 병적인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저자와 비교할 때 나의 예술관은 사회/현실 비판적 측면에 대한 의식이 보다 약하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예술의 매혹의 힘을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예술관과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예술과 대중, 고급예술과 하위예술, 이론과 실천 등의 대립관계의 융합, 혹은 그 경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고민을 계속해왔는데, 그 바탕에는 4년간의 거리미술전 기획단 활동이 있다. 거의 모든 미술계의 기성세대가 무관심할, 심지어는 우리 미대의 학생들조차도 어떤 관심과 흥미, 가치를 두지 않을 이 작은 행사/전시를 치러온 경험이, 그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적어도 내 작은 스펙트럼 내에서는 한껏, 계속하여 문제적 의식을 발생시켜왔다. 아는 것도 없고 생각도 어린 학생의 작은 자의식 속에서 해결되지 않던 문제들은, 저자의 비평들을 통해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저자는 저자이고 나는 나이기에, 상당 부분 공감하거나 학습할지언정 저자의 관점이 나의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아직 초짜에 불과한지라 앞으로도 수년 수십 년을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찾아가야 함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저, 지금 이 시점, 학부 과정을 약 한 학기 남겨두고 대학원 진학에 대해 (나름대로는) 고뇌하고 있는 젊은이로서, 그간의 고민을 발전시켜나감에 있어 앞으로의 방향을 찾는 것에는 다소간의 보탬이 되었다.
한 권의 책과 스물아홉 개의 비평문에 대한 RE-VIEW, ‘다시 읽기’라고 하기에는 이 글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사색과 몽상의 연대기나 다름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저자가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과 자신의 비평이 각각 다른 유기적 형식을 갖는 별개의 산물임을 공고히 했듯, 이 글의 대상이 되는 한 권의 책과 그에 대한 나의 수용, 이 글은 별개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으로 조심스레 변명하며 마무리하려 한다. 나는 저자의 예술/비평관과 그에 입각한 비평들로부터 나 자신의 예술관이 어떻게 현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또한 저자의 이론적 바탕이 비평의 실천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를 발견함으로써 학문적 성찰과 작품과의 마주함에 있어 나의 학습 및 연구가 어떻게 균등하게 생동하도록 할 수 있는가의 실례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비평들은 실제적으로 작품을 읽는 방법을 익혀나가는 하나하나의 훈련이 된다. 결국 이 글은 저자의 비평들이 나에게 어떤 효용을 갖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한, 아주 주관적인 ‘사용 가이드’의 하나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그래, 나도 미술을 한다.
# by | 2009/07/15 16:53 | 독고다이 | 트랙백(2)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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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분의 사랑이 문학과 미술의 αγάπη(아가페)적 사랑이란 점이라서 흐뭇합니다.
두분의 책이 나온 2009년은 새로운 시작이 될 것 같네요.
"가장 배후에 놓여있지만 가장 우선되는 전제이자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은 바로 미술에 대한 사랑이다. "
이런 부분을 읽으면 보통 핏... 그래 뭐 모든 것이 다 사랑이고 하느(나)님 섭리지 뭐 싶어지기 일수인데, 윗 글에서는 글쓴이가 표현한 그대로 "매혹의 힘"이자 "아방가르디즘"으로 전해지는군요.
암튼 저도 리히터의 모짜르트 베토벤 들으러 갑니다. ㅋ
듣기만 할 때와는 달리, 유튜브 영상으로 실황 연주 장면을 보면서, 건반 앞에서(음과 음 사이) 리히터가 자신의 손가락을 얼마나 예민하게 컨트롤하는지 알았어요. 머리 신경줄이 팽팽해지는 느낌!
과다복용시에는 좀 피곤해지기도 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