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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을 잇는 미술의 자력(磁力)은 어떤 시간대를 관통하는가? art und weise

전시 이미지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
http://www.magneticpower.kr/


한-아세안을 잇는 미술의 자력(磁力)은 어떤 시간대를 관통하는가?



   전시장 모서리 왼쪽과 오른쪽, 두 벽면에 두 개의 영상이 상영 중이다. 영상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는 1인용 관람 의자 몇 개가 놓여있다. 화면과의 거리, 시선의 높이가 꽤 정교하게 조정된 것처럼 느껴지는 그 둥그런 의자에 앉으면, 감상자는 한 눈에 두 영상이미지를 볼 수 있다. 그 시각 경험은 마치 오른쪽 영상 속에 등장하는 휠체어 탄 사람의 시야처럼, 낮은 눈높이로 정면을 보며 이동하면서, 곁눈으로는 스쳐지나가는 옆의 풍경을 보는 것과 같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오른쪽 영상과 왼쪽 영상이 상반된 풍경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가 기능적으로 구획된 대로, 고가상품과 쇼핑객으로 넘쳐나는 대형쇼핑몰을 통해 개발에 성공한 도시의 외관을 투사한다면, 후자는 정반대로 잡초만 무성한 채 버려진 집, 낙서로 가득한 벽, 기계가 멈춰선 공장 지대를 거칠게 훑는다.


   이상에서 소개한 영상작품은 말레이시아 작가 웡호이 청의 <Suburbia>이다. 이 비디오는 한-아세안 센터(Aesean-Korea Centre)가 주최하고 독립큐레이터 김유연이 기획한 <Magnetic Power>전에 초대돼, 코리아나 미술관에서 위와 같은 형태로 선보였다. 나는 우리가 웡호이 청의 영상을 통해 이 기획전이 탐색하고자 한 “아세안 지역 사회의 여러 측면들”과, 전시가 지향하고자 한 “국가들 간 의사소통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문화교류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고 본다. 달리 정의해 보면, 전시는 물질적 발전 면에서든 사회적 의식의 성장 수준에서든 지역적 차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 벨트로 묶일 수 있는 ‘아세안 국가들’의 현재 삶을 ‘사진과 미디어 아트’를 통해 조명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과 말레이시아 ․ 베트남 ․ 브루나이 ․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10개국의 아티스트 30명이 상이한 예술언어로 만든 작품을 ‘자석의 힘(magnetic power)이 작용하는 매개적 공간에 내놓고 ‘교류와 혼성’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이런 경우 미술은 현실 지형을 엮고 복합화하는 자기장(磁氣場)으로서 ‘사회적 매체(medium)’가 된다. 이를 한-아세안 문화의 ‘양안(兩眼)적 시야’와 ‘시점(時點/視點)’이라는 테제로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국과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식 모더니즘이 일방 주의적으로 사회구조와 문화 전반을 재편성한 가까운 과거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시 작품에는 대체로 두 개의 풍경과 두 방향의 작가적 자기 인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전통적’, ‘토속적’, ‘낙후된’ 등등의 수사(rhetoric)로 묶이는 근대화 이전 풍경과 ‘기술적’, ‘세계적’, ‘현대적’ 등등으로 대변되는 글로벌리즘 이후 풍경이다. 
어떤 작가들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 풍경을 혼재 또는 분열된 것으로 현상하고, 또 다른 작가들은 지나가버린 과거를 향한 향수어린 시선을 현재 삶의 복잡다단한 지형에 투사한다. 이 두 풍경, 작가적 성찰에는 예컨대 샤리프 조크린이 브루나이의 야간 재래시장을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 캄보디아 작가 리노 부스가 오토바이 사이드미러에 비친 일용직 노동자의 모습과 휘황찬란한 도시 정경을 중첩시켜 포착한 사진, 베트남의 팸 뉴 린이 공산당 깃발이 펄럭이는 수용소나 사이공 거리를 찍고 그 사실적 이미지에 멜랑콜리한 색채를 가미한 사진이 속한다. 이들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는 웡호이 청의 투 채널 비디오와 같은 양안의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경제개발과 물질문명화로 매끈하게 변모한 아시아의 폐부에 새겨진 지역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상실감을 보는 눈이다. 다른 한편으로 글로벌리즘의 유행 아래서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문화적 차이’나 ‘타인의 취향’으로 손쉽게 낭만화 하고 기표화해 버리는 동아시아 이곳의 현존 문제를 각성하는 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말레이시아작가 이이란의 <Kerbau>와 필리핀 작가 포크롱 아나딩의 <Anonymity>에 주목한다. 전자는 동남아시아에서 숭배되는 ‘물소(Kerbau)’ 사진을 합성하여 만든 일종의 빌보드인데, 여기서 물소는 제의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세계화 조류에 밀려 사라져가는 ‘풀뿌리 삶’을 환기시키는 정치적 상징이다. ‘익명성’이라는 제목의 후자는, 거리를 걷는 일반인이 작가의 요청에 따라 자신들의 얼굴을 거울로 가리고 찍은 초상 사진 시리즈이다. 여기서 감상자인 우리는 어떤 이방인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난반사되는 누군가의 ‘있음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어찌 보면 여타 동남아시아 작가들에 견줘 ‘이미 너무’ 글로벌해진 한국 작가들의 사진과 영상에서는 찾기 어려워진 주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제주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찍은 김옥선의 연작사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간의 익명적 존재(being)’라기 보다는 작가가 논쟁적인 시선으로 포착한 ‘사회 제도의 산물인 바로 그/녀’이다. 내게는 이러한 다름이 작가 개인의 ‘시점(視點)’에서 유래하는 것도 있지만, 작가가 속해있는 그 사회의 정치경제적 ․ 문화적 ‘시점(時點)’과 더 큰 상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 질문은 여기서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한-아세안을 잇는 미술의 자력은 어떤 시간대를 관통하는가?

 

강 수 미 (미학)
월간미술 200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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