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영: 사물은 의미라는 빌린 옷을 미끄러뜨린다. 0

정서영, 《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 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展 설치 전경, 2007.
정서영: 사물은 의미라는 빌린 옷을 미끄러뜨린다.

어떤 전시장에는 작가의 과시적 의미가 낙석처럼 널려있다. 반면 어떤 전시는 그것이 전혀 없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사물의 불투명한 존재 상태를 매만져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 소위 ‘문화’다. 그 인간적인 것에 논리성을 더하면 그것이 소위 ‘학문’이고, 심미성을 더하면 우리가 ‘예술’이라 이름 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자꾸 사물에 의미를 덧붙이는 우리의 당연한 문화 ․ 예술에, 어떤 작가는 자꾸 ‘의미’를 빼려 한다.
정서영은 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이 작가가 빼려는 ‘의미’는 흔히 전위 예술가들이 그러듯이 미술사적 선배세대의 ‘낡은 미술’의 의미가 아니다. 그녀가 빼려하는 것은 사물에 당연한 듯 달라붙는 ‘의미 일반’이며, 그렇게 해서 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물의 ‘있음(存在)’ 그 자체다. 그 있음에는, 예컨대 ‘거위 조각’이라는 명제식 결론이나 굳은 물건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이는 무엇인가의 있음, 그리고 우리가 그 있음을 보고, 느끼고, 나름대로 경험하고 있는 사태가 속한다.
에르메스 전시장의《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 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展에서 정서영은 우리 안에서 습관적으로, 소통가능하게, 타협한 의미의 ‘장르적 미술’을 지웠다. 그 지운 공간에, 배타적 감각 지대를 독점적으로 경험할 줄 아는 이들의, ‘한 번만 가능한’ 풍경의 장(場)을 그리는 동시에 조각했다. 아니, 낙서의 선(線)이 조각의 얇은 부피가 된 <정오에서 자정까지>에서 보듯, 그리지 않으면서 조각했고, 조각하지 않으면서 그렸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완성’한 것을 자축하고, 돌아서서 잊어”버렸겠지만, 어떤 감상자는 여기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완성시키거나 규정하지 못할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자전거와 손전등은 “멀멀한” 빛을 조각하고 있고, 그것들에 동력을 부여하고 있는 전깃줄은 공간을 부드러운 커브로 드로잉 하고 있으며, 모래가 담긴 노란 통은 뒤샹의 <Large Glass> 상단에 떠 있는 구름을 3차원 입체로 불러들이고 있고, 거위의 방은 투박한 제스처를 표징하고 있으며...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지각 경험이 발생할 수 있는 이 전시에서, 어떤 이의 사고는 정서영의 <동서남북>처럼 사방에서 열리고 닫힌다. 그 사고는 일부러 기능을 절단시킨 식탁처럼 쓰임새와는 먼 것이겠지만(<식탁>), 전시장 마룻바닥을 기습적으로 물들인 어떤 액체처럼 전형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분명 존재하고 그 자체로 의미다.(<얼룩>) 내가 미술에서 빌려다 쓰는 관성적 의미가 아니라 내가 존재에 따라가는 ‘한 번만 가능한’ 의미.

강 수 미 (미학)
월간미술, 200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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