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y Budd, 허먼 멜빌이 형상화한 비극 0

공식적인 종강은 12월 셋째 주에 했지만, 과제다 성적처리다 해서 실제로 종강한 것은 12월 21일 경. 그러고도 이러 저러한 일과 모임 자리에 좇기다 보니 고요하게 제 시간을 갖은 건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26일 경이다.

방학을 맞아 본격적으로 공부에 들어가기 전(하긴 할 건가부지?) 쉰다는 의미에서 손에 쉽게 잡은 책이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Billy Budd (1888-1891)다.
김정매 교수가 편집하고 비평 서론을 쓴 영문본 『Billy Budd』(1990, 신아사 출판사)와 최수연이 번역한 『빌리 버드』(2002, 열림원)를 같이 읽었는데, 김정매 교수가 쓴 비평 소개문은 멜빌의 문학세계와 그의 유작이 된 빌리 버드에 대한 서구의 비평을 간결하면서도 균형 있게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원작이 창작된 시대와는 꽤 시차 져 읽을 수밖에 없는 우리 같은 후대의 독자들에게, 멜빌의 글이 그 시간차를 뚫고 공명할 수 있는 지점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해서 빌리 버드는 진부하거나 고색창연하게 읽히지 않는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비평적 소개 글의 힘이라기보다는 본래 멜빌의 글이 내재하고 있는 힘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게 옳다. 빌리 버드는 한 시대나 사회, 지역의 특수한 조건 너머 결국 인간이라면, 그리고 그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같이 산다면 벌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그 공동체(혹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이 아닌 어떤 불의(不義)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애초에 벌거벗고 태어난 인간은 외적으로는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기 고유한 성격을 갖고 태어난다. 그 각각의 개성을 유형화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 폭력적일 수도 있지만, 대개 우리는 특정한 기준에 따라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눔으로써 인간에 대한 보다 큰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착하되 단순한 사람/악하지만 강렬함을 가진 사람, 영리한 사람/영악한 사람/지혜로운 사람, 순진한 사람/용의주도한 사람/깊이를 다 알 수 없으되 명쾌한 사람 등등.

소설의 제목이 된 “빌리 버드”는 아름다운 용모와 타인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하는 내, 외적 요소를 갖고 있고,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순진 그 자체’인, 저자의 말을 빌리면 “[악의 상징인 뱀으로부터]수상쩍은 지식의 사과를 아직 받지 않은 순수한 인간 [즉 아담]”으로서, 이 비극 소설의 주인공이다. 한 영국 평자는 이 빌리 버드라는 인간 유형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처럼 “의식적으로 도덕성과 의로움을 가르치지는 못하지만, 그가 순수하고 선하기 때문에 악의 미움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 둘은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인물을 좀 더 소설의 전체 내용과 연결시키자면, 이 소설의 한 축은 근원적으로 순진하고 악 이전(혹은 선/악의 이분법 이전)의 선(善)인 빌리 버드가 전투용 함선이라는 폐쇄된 사회에서 악과 악운(惡運)과 법으로 상징되는 제도에 부침(浮沈)하는 사건으로 지탱하고 있다. 그는 “악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악이 갖가지로 둔갑해서 나타나는 미묘한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당혹할 뿐”인데, 그와 대비해서 이 글에서 명시적으로 구현된 악의 인간 유형이 클라가트(Claggart)라는 선임 위병 하사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선하기보다는 지혜롭고, 본인의 악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제도적 위계질서와 폭력적 권력관계 유지 때문에 결국 한 선한 인간을 희생시키는 비어(Vier)선장이라는 다른 인간 유형이 버드/클라가트라는 두 축에 관계해 있다.

멜빌의 이 소설은 19세기 영미소설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사건의 필연성을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거나 설정한 주제가 자연스럽게 도출되도록 텍스트의 교집합을 정교하게 엮지 않는다. 그런 문학적 기술보다는 오히려 보다 큰 의미, 예를 들어 인간의 선/악의 전형이나 개인/사회 공동체, 후자를 위한 전자의 희생 등을 두드러지게 형상화하기 위해 세부들을 탈락시키면서 사건의 바늘땀을 크게 띄며 간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 복잡한 텍스트의 겹침으로 정신 분열증에라도 걸릴 지경이 되거나, 외과의사의 메스와 내시경처럼 심리의 내부로 내부로 파고드는 현대 문학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이러한 내러티브 구성과 묘사기술은 다소간 ‘황당’하고 ‘헐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빌리 버드를 읽으면서, 과연 이 글의 내러티브 구조가 헐거운가? 전달력이나 공명의 강도가 약한가? 질문해 봤다. 21세기 내 감수성으로 이러한 구조와 문체를 재단할 수 없다는 다소 중립적인 태도로 답을 유보하면서도,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느끼는 어떤 호방함과 호소력을 잠시 떠올렸다. 빌리 버드의 구조와 문체에 어느 정도 그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또, 이런 생각의 이후, 그리스 서사시나 비극이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었고, 서구문화의 면면에 스며들어 있는 그 그리스 문학에 내재하는 특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이야기’를 이야기하는가?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잠정적으로 나는 이 특질을 ‘비극을 향한 완결성’과 ‘설명하지 않음’으로 들고 싶다. 그리스 서사시나 비극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근원적으로 주어진 운명과 그 운명에 대한 환기, 그리고 카타르시스이다. 그러한 목표를 상정해 놓고, 비극은 무사여신들의 영감을 빌어 말하기 시작하고,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운명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며, 급전(急轉)을 통해 삶의 비극적 본질을 드러낸다. 그러한 비극의 특질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De Poetika』에서 비극을 논하는 가운데 들었던, 비극이란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고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했던 형식과 내용이 잡스런 논설 없이 완결성을 향해 간다. 나는 빌리 버드가 이러한 비극의 특질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의 짧은 시기 운명의 행로를 꿰어 우리로 하여금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지 않음’은 이 비극적 특질이 당연하게 채택하게 되는 묘사기술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설정해 본 말인데, 이는 세세한 장경(場景)이나 등장인물들 간에 오가는 구체적인 대화를 묘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칫 지적 장식이나 감정적 과장으로 흐를 수 있는 세부묘사를 삭제 혹은 포기함으로써 소설은 비극이 가능하지 않은 근대에 비극의 뒤를 이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물론 이에 대해 더 생각해 볼 문제다)

가볍게 빌리 버드를 리뷰 하려던 애초 목적에서 벗어나 자못 심각한 문제로 확장되어버렸다.
그러나 몇 가지 사유할 문제를 건졌으므로 간단히 메모를 하기로 한다.

1. 그리스 비극과 19세기 소설의 형식적 유사성(Nietzsche의 『비극의 탄생』/Benjamin의 『독일 비애극의 기원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이 왜, 어떻게 쓰여 졌겠는가?)

2. 선 이전의 선은 빌리 버드처럼 사태에 대해 단순하게 반응하며, 악에 대해 무지한가?
3. 선과 대척점으로서의 악이 아니라 절대 악이란?
-악은 비선(非善)이 아니라 그 자체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멜빌은 이러한 악을 클라가트로 형상화 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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