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 지상에서 아트를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 지상에서 아트를

쿨투라  2022. 7월호.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 지상에서 아트를!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어떤 예술작품은 감상자에게 환호와 두려움을 동시에 안긴다. 막대한 자본이 투여된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최첨단 과학기술과 감각지각 장치가 총동원된 스펙터클 영화나 대규모 미디어아트 전시가 그러하다. 인공지능, 로봇, 빅데이터, 알고리즘,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현란한 동시대 기술력이 당장의 촉각적 열광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만큼이나 기술의 강력한 힘에 밀린 관객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 힘이 평범한 사람들의 상투적 사고방식에 부담을 주고, 습관적으로 행해온 경험의 경로를 찢고 흔들기 때문이다. ‘현대미술 전시장하면 네모난 하얀 벽과 밝은 빛으로 감싸인 화이트큐브(white-cube) 공간이 떠오른다. 하지만 컨템포러리 미디어아트는 영화관처럼 대개 닫힌 구조이고 암흑의 블랙박스(black-box) 전시장에서 선보인다. 때문에 거대한 스크린들과 강력한 사운드가 휘몰아치는 몰입형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쏟아지는 시청각 자극에 빠져 황홀경을 느낄 가능성이 커진다. 따닥따닥 붙은 의자에 모여앉아 2~3시간 반강제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관과는 달리 언제든 이동할 수 있고, 심지어 초대형 쿠션에 누워 감상하는 독특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관객은 이 하이엔드 미디어아트 이미지들이 자신이 결코 알 수 없는 차원의 기술력과 인간 역량의 합작, 앞서기는커녕 뒤따르기에도 벅찬 거대하고 치밀하며 거스를 수 없는 사회적 대세의 가시화임을 자각한다. 그 순간 뒤처짐에 대한 공포(FOMO; Fear of Missing Out)가 밀려온다. 또 자신을 빼고 전개되는 비가시적이고 닿을 수 없는 막강한 사회 진보에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현대미술계의 미디어아트 중에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한껏 이용해 제작하되, 관련 이슈에 대한 밀도 높은 조사 연구를 바탕으로 비판적이고 통찰적인 내용을 담는 데 성공한다. 그런 작품에 특화된 관객에게 아트는 슈거파우더 뿌린 힐링이 아니다. 현실에서 느껴온 미래에 대한 두려움, 기술의 추월이 유발하는 압박감, 무지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런 부정적 감정을 딛고, 작품을 통해 실제 삶과는 다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가시성과 가독성이 생긴 쟁점을 눈앞의 스펙터클 속에서 분별하고 채굴해낼 수 있게 한다. 이에 관해서는 독일의 현대 미술가이자 영화감독이고, 비평가이며 이론가인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1966년생인 그녀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예술, 사회학, 철학, 정치학, 미디어이론을 횡단하는 학술적이고 비평적인 글을 써왔다. 국내 번역된 스크린의 추방자들, 면세미술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 번역된 주요 저서만 해도 여러 권이다. 그런 슈타이얼이기에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그녀의 가장 큰 성과 또한 이론적으로 엄격하고 가치 높은 내용을 미디어아트 형식으로 독특하고 뛰어나게 구현해냈다는 사실이다. 2022년 현재 그녀의 명성은 독일의 문화예술계를 넘어 글로벌 아트신의 최고점에 도달했다.

 

데이터의 바다를 비판의 지상 위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작가로서 슈타이얼을 초청해 아시아 최초 대규모 개인전을 기획한 사실이 작가의 위상과 중요성을 말해준다.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Hito Steyerl-A Sea of Data(5.27-7.17)가 바로 그 전시다. 1990년대 초기작 범주인 다큐멘터리 방식의 필름 에세이 <독일과 정체성>(1994)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위촉한 신작인 4채널 비디오 설치작품 <야성적 충동>(2022)까지 총 23점이 집결함으로써 회고전에 버금가는 수준이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지하 12, 3, 4 전시실 및 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전시가 펼쳐지고, 그에 더해 MMCA 필름앤비디오에서는 전시 연계 특별상영이 이어진다. 전시 출품작의 양적 규모뿐만 아니라 각 작품의 형식적 차원 및 내용의 밀도가 워낙 넓고 깊고 복잡하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많은 시간과 지적, 감각적 에너지를 투여할 필요가 있다.

그럴만한 가치가 차고 넘친다는 점을 이 짧은 글에서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슈타이얼의 거의 모든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비슷한 의미의 강도와 표현의 종합성을 갖기에 작품을 선택적으로 보는 일도 그리 좋지는 않다. 그래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을 꼽는다면 <소셜심>(2020), <면세미술>(2015), <태양의 공장>(2015), <야성적 충동>(2022)이다. 이 작품들은 제작 시기도 다르고 작품의 형식과 내용 모두 개별적이다. 그러나 슈타이얼 특유의 냉정한 현실 통찰력이 작품의 기본 내러티브를 이루고, 그 내용에 부응하는 기술적 매체 및 프레젠테이션 방법론을 구사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가령 팬데믹 동안 전 세계인의 일상을 장악한 온라인 매체 환경, 디지털 시뮬레이션 행동방식과 상호작용에 관한 5채널 영상 <소셜심>을 보자. 이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검은 방 구조의 영상설치작품은 2020년 일어난 군중 시위, 경찰 진압, 희생자 등의 데이터 연산과 AI 분석 값을 게임 속 가상 경찰과 군인 캐릭터들의 춤으로 실시간 시청각화 한다. 관객은 그 깜깜한 공간과 현란한 이미지 스크린이 지배하는 작품 앞에서 기이하게도 짐볼에 올라타 뒤뚱거리며 작품을 보게 된다. 마치 영상 속 멍청해 보이는 몸집의 경찰이나 뻣뻣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군인이 그러듯이. 슈타이얼의 미디어아트작품이 탁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녀는 기술과 미디어 조건이 변화하는 와중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훈육되는 삶의 국면과 어색하고 부조리함에도 좇게 되는 주도적 시스템을 보고 인식할 수 있게 작품화한다. 그것도 어설픈 인문학이나 반()기술의 담론으로 그럴듯하게 명분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반()사회적 효과와 균형이 깨진 힘의 위험을 정확히 모방하며 비판하는 이해력, 기술력, 표현력 삼박자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미적으로는 새로운 조형언어, 지적으로는 날 섰지만 정교하고 풍부한 담론가능성, 기술적으로는 최첨단 수준이며 동시에 그 자체를 저격하는 실험주의. 이 점이 현대미술 중 슈타이얼의 작업이 가장 의미심장한 예술로서 존중 받아야 하는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 제목으로 채택한 데이터의 바다는 슈타이얼이 2016e-flux 저널에 발표한 논문 데이터의 바다: 아포페니아와 패턴()인식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 작가가 수십 년의 연구 및 창작에서 끈질기게 문제시하고 있는 특정 세계를 명시한다. 요컨대 동시대 우리 현실 자체.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생산물, 빅데이터 환경과 기술공학적 질서의 결과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물고기처럼 자연스럽게 헤엄치거나 심연으로 처박히거나 하고 있는 삶의 현장. 문제는 슈타이얼이 글의 부제로 쓴 아포페니아와 패턴()인식이 표적 삼듯, 엉터리이거나 악의적인 데이터 해석, 남용, 구성, 재구성 등으로 세계를 오인하는 것이다. 반면 그녀의 미디어아트는 그 오인의 패턴을 지상의 현대미술로 깨뜨리면서 세계 인식에 기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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