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a 연재-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3-‘안드레아스 거스키’라는 장르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안드레아스 거스키’라는 장르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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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라슬로 모홀리너지(László Moholy-Nagy). 이름은 익숙하지 않더라도, 다음 사실을 들으면 대부분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나는 당시 아날로그 사진 시대였음에도 카메라나 필름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그램(photogram)을 발명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실습해 본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감광지 위에 놓인 피사체를 빛에 노출시키면 흑백의 사진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이 바로 포토그램이다. 모홀리너지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하나는 말이다. 그는 미래의 문맹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를테면 이미지 맹(/blind). 거기서 벗어나려면 글을 깨치듯 이미지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문자이해력만큼이나 이미지이해력(visual literacy)이 필수인 세상. 그런데 2022년의 우리는 모홀리너지가 상상한 것보다 더 이미지가 만능이고 절대적으로 범용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고성능 디지털카메라가 몇 대씩 내장된 휴대폰으로, 또 보정과 합성은 물론 애초부터 가상이미지가 생성되는 디지털 앱과 편집프로그램을 가지고, 누구든 쉴 새 없이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을 SNS에 올리고, 다른 이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며 공유하는 일이 곧 소통이고 문화다.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사진 스타일쯤은 따라 해야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다. 사진은 우리 삶 속에 어느덧 이렇게 가장 중요하지만 도처에 널렸고 누구나 생산하고 소비하는 흔해빠진 것이 되었다. 모홀리너지의 예언이 초과 실현된 것이다. 이런 판국에 정작 예술가와 예술사진은 뭘 하는가?



스케일과 디테일

국내에서는 최초로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의 사진 개인전이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955년 옛 동독 치하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했으니 올해 60대 중반인 거스키는 현대 예술사진(art photography), 현대미술의 특정 사진 경향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다. 그는 독일 근현대미술의 산실인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 출신이다. 그 중에서도 유형학적 사진의 큰 줄기인 일명 베허학파, 즉 베른트와 힐러 베허(Bernd & Hilla Becher)1세대 제자다. 하지만 거스키는 스승의 뒤를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사진예술로 새로운 가지를 뻗어냈다. 요컨대 베허 부부가 1950년대 말부터 독일과 영국 등 유럽의 공업지대를 돌며 촬영한 근대 산업구조물 연작은 미술가의 주관이나 정서를 배제하고 세계를 유형(type)으로 증거, 수집, 분류, 기록했다는 점에서 유형학적 사진의 뿌리로 인정된다. 거스키는 그 사진미학에 영향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진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록 매체나 기계적 표현 기술 정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스키는 완벽한 예술사진을 만들어내는 데 헌신한다. 작품이 될 화면의 시각질서에 피사체가 수렴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상을 구성하고 심미적으로 매만지는 것이 그만의 방법이다. 그 미학적 수준이 안드레아스 거스키자체를 장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다.

거스키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니 예술가 경력만 벌써 40년이다. 그간 거스키는 250여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얼핏 대단치 않은 작품량 같다. 가령 세잔이 9백여 점에 달하는 유화를 남겼고, 피카소가 3만점 이상의 작품을 창작했다는 사실에 비추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거스키의 사진을 본 사람은 그 단순한 작품 수량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하고 스펙터클한 세상을 밀집시킨 각각의 사진들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스위스 알프스의 거대한 바위산과 산중턱에 모래알처럼 미세하게 박힌 사람들을 찍은 초기작 <클라우젠파스(Klausenpass)>(1984)부터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키 활강 코스를 담은 최근작 <스트레이프(Streif)>(2022)까지, 거스키의 사진은 그야말로 개체를 일일이 셀 수 없는 다양성과 질량을 가졌다. 또 그를 유명하게 만든 <99센트>(1999)에서 LA 저가상품매장의 각 잡힌 질서가 이십 여 년 후 작품인 <아마존>(2016)에서 디지털 물류시스템에 의한 카오스의 질서로 넘어온 것을 보라. 우리는 거기서 거스키의 사진이 시대의 켜를 쌓고 있음을 본다. 요컨대 거스키의 250여 장 사진은 모두 이어붙이면 세계 자체가 온전히 이미지로 재현될 것 같은 복합성과 밀도를 자랑한다. 마치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과학의 정밀성에 대하여에 나오는 제국의 지도, 실제의 제국을 뒤덮을 정도로 광대하고 정밀하게 만든 그 가상 영토처럼 말이다.

 

예술사진

하지만 누군가 내게 그의 사진예술을 딱 세 문장으로 짚으라면, 나는 다음처럼 쓸 것이다. 1) 그 사진이 진짜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2) 애초부터 진짜라고 믿기에는 사진의 내용이 너무나 초고도 현실(Hyperreality)처럼 보인다. 3) 그 사진의 시각적 요소와 완성도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탈 인간계 급이다.

거스키의 사진을 전시할 수 있는 곳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처럼 층고가 높고 벽면과 바닥이 광폭인 초대형 전시공간을 보유한 미술관들이다. 그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거의 모든 사진들이 인간의 시야로는 결코 한 번에 볼 수 없는 스케일로 출력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표작 중 하나인 <파리, 몽파르나스(Paris, Montparnasse)>(1993)를 보자. 수직과 수평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긴 직사각형 구조로 설계된 파리의 초대형 아파트를 촬영한 것으로 세로 2미터, 가로 5미터 크기로 프린트된 작품이다. 한 번에 감상할 수 없는 규모의 작품이기에 감상자는 최소 3미터 이상 떨어져서야만 전체를 볼 수 있다. 또한 그 사진의 전면들을 쭉 따라가며 디테일을 보게 된다. 그때 감상자는 작품 크기와는 또 다른 놀라움을 경험할 것이다. 거대한 화면 속 아파트의 각 창들마다 완벽하게 다른 실내가 담겼기 때문이다. 어느 집 하나, 어느 창문 속 인테리어 하나가 같지 않다. 하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로 화면의 모든 부분이 정확하게 보인다. 특정 대상에 초점을 맞추면 그 주위는 흐려지는 것이 우리가 아는 카메라의 피사계 심도(depth of field). 그런데 거스키의 작품은 마치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듯이, 하지만 그렇게 보기를 바늘구멍 하나 없이 촘촘하게 수행한 것 마냥 심도가 균일하다. 2×5미터의 화면에서 몽파르나스 아파트 입주자 수 천 가구의 생활이 균질하게, 동시에 이질성의 천국마냥 완벽히 제각각으로 재현됐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인간의 시각능력이 그렇지 못한 만큼이나 카메라의 렌즈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스키의 사진이 한 번에 한 컷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구성물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맞다. 거스키의 사진이 진짜가 아니라는 의미는 바로 이미지를 후반작업(post production)해서 얻은 결과라는 뜻이다. <파리, 몽파르나스> 경우 아파트 건너편에서 두 시점으로 촬영한 사진들을 조합한 것인데, 소실점을 제거하고 수직수평의 디테일을 정교하게 수정하는 후반작업을 거쳤다. 앞서 <아마존>도 마찬가지다. 거스키는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모든 선반들을 선별해 찍은 후 그 각각을 디지털로 합성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미술관에서 보는 그 상품들의 우주, 혹은 아마존 카오스가 사진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것은 절대자의 눈으로만 가능할 것 같은 스펙터클을 경험하게 해준다. 동시에 디테일을 뜯어보기에는 이미 인간의 현실적 경험 범위를 초월해버린 이미지 전지전능시대를 실감나게 각인시킨다. 역설적이게도 거스키가 현대 예술사진에 기여한 점이 바로 거기다. 세상만큼이나 거대한 규모와 정교하고 복잡한 실체를 담은 사진이 인간과 세계를 초과한다는 것. 예술사진을 감상하다가 이미지 아래 놓인 동시대 삶을 자각하는 타임(현타)을 맞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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