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a 연재-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2-이상남의 ‘인공’; 수직 수평의 인간 그림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이상남의 ‘인공’; 수직 수평의 인간 그림

  • 강수미(미학자, 미술비평가,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전시장의 그림들은 대개 감상자와 수직으로 마주한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계의 회화는 인간적 규모를 넘어 점점 더 스펙터클해지고 있다. 내용 면에서도 일찍이 잭슨 폴록의 드립페인팅(Jackson Pollock, Drip Paintings, 1940년대)처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주제가 된다. 혹은 데미언 허스트의 버터플라이페인팅(Damien Hirst, Butterfly Paintings, 1991)처럼 도발적인 소재와 표현법 자체가 이슈인 경우가 많다. 그런 미술가들에게 그림은 이젤 위에 세워놓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평 상태로 놓고 온몸을 써서 제작하는 장르다. 가령 작품 사이즈가 대형이어야 할 때 천이든 패널이든 종이든 화폭은 아틀리에 바닥에 펼쳐진다. 형상을 묘사하는 대신 물감 등의 질료를 흩뿌리거나 큰 붓질로 화면을 채우는 퍼포먼스, 살아있는 나비가 두꺼운 물감 층에 붙들려 서서히 굳어가는 상황이 쟁점일 때 수평의 평면은 절대적 조건이다. 또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이상남 작가의 그림들처럼 완벽에 가깝게 균질한 밑칠 작업과 고도로 정교한 세공 및 중첩을 요구하는 회화에서도 수평성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런 경우 아티스트의 눈은 마치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지상을 탐색하듯이 위에서 아래로 꽂힌다. 동시에 신체 전체가 중력에 작용-반작용하면서 그림의 전면과 세부를 두루 포섭해 파고들 것이다. 요컨대 화가의 수직적 시선과 몸의 지각이 수평의 이미지 장()과 얼마나 효과적으로 길항 혹은 상호작용하느냐에 예술적 성취도가 판가름된다.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작가가 그렇게 수직과 수평을 교직하고 온 감각과 신경을 종합해 완성한 그림을 관객은 갤러리 또는 미술관 벽 위에 똑바로 걸린 정적인 오브제로 감상한다는 사실 말이다.

 

x 축과 y

PKM갤러리에서 열린 이상남: 감각의 요새(3.17~4.16) 개인전은 위와 같은 현대미술계의 회화 경향을 명시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주고, 작가만의 밀도 높은 장인적 역량과 조형성으로 독자화한 전시다. 우선 이상남 작가가 누구인지부터 보자. 그는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8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젊은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40년 넘게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PKM갤러리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기관들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올해로 69세인 이상남은 나이나 경력 면에서만이 아니라 작업의 질적 · 양적 성취 면에서 한국 현대미술계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이고 원로의 위치에 선 화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늙음이나 노회와는 거리가 멀다. 창작 활동 면에서 역동적인 템포를 놓치지 않아왔고, 작업에 관한 물리적 지적 탐구 면에서 꾸준히 도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남의 회화 세계가 수십 년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와 특유의 방법론을 지키되 매 개인전마다 확연히 드러나는 결정적 변화를 창출해내며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요컨대 이상남의 그림들은 수평의 캔버스에 거의 100여 회의 옻칠과 갈아내기를 반복하는 밑칠 작업으로 얻어낸 화면, 대리석보다 균일한 그 표면에서 시작한다. 화면의 두께를 x축이라 가정하면 거의 영도(zero)에 육박하는 화폭 위에 상징적 기호와 선형적 패턴이 무수히 쌓이고 겹친다. 또 선과 면이 분할하며 만화경 같은 형상의 디테일들이 세공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전면적 추상을 이루는 대작이 바로 이상남 회화의 특징이다. 그것들은 마르셀 뒤샹의 일명 <큰 유리>(1915-1923) 같은 작품 속 초콜릿분쇄기나 자전거바퀴 형상처럼 근대적 기계장치를 닮은 도상부터 기하학 도형, 전자기장 그래프, 나아가 우리 시대의 디지털 알고리즘 패턴까지 시공과 분야를 가로질러 다종다양한 대상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림 속 형상들이 실제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는 이의 연상 작용을 자극할 만큼 감각적으로 유사하다. 나는 여기에 이상남 회화의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해석을 촉진하는 잠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미술 안에서 인공을 독특한 의미로 분별한 점이 단서다. 요컨대 이상남의 관점에서는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에 상관없이 인간 문명이 축적한 모든 도상과 부호가 곧 직선과 원으로부터 출발한 인공의 성과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상남의 작업에 대해 인간이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만들어낸 문명의 파편들, 이를테면 통시성/수직의 y축을 자기 그림의 도상, 기호, 패턴, 구성과 색채로 응축시켜 공시성/수평의 x축 표면 위에 전개한 추상화라는 미학적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

 

요새를 열고 인간들에게로

그렇게 거창한 추상의 세계가 이상남의 이번 개인전에서는 높은 천장과 넓은 벽면의 PKM 전시 공간을 압도했다. 가로 3.8미터의 대표작 <감각의 요새(L127) The Fortress of Sense(L127)>(2015)을 포함해 2미터가 훌쩍 넘는 <감각의 요새><Light + Right> 연작들이 서로 거리를 두고 독립된 벽체에 걸려 각자의 존재감을 발휘한다. 작품 크기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다. 그런데 전시작들을 측면에서 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캔버스 틀의 두께와 그 위의 물감 층은 극도로 얇고 완벽히 매끈하다. 그래서 그림을 마주한 감상자는 마치 올레드 TV나 태블릿 터치스크린의 표면을 보는 것 같은 환각에 빠질 수 있다. 이를테면 이상남의 캔버스가 그 최첨단 디지털 디바이스들과 동질인 듯, 심지어 그것들을 능가하는 인공적 비전을 구현한 듯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상남 작가가 기하학적 조형 언어로 연마한 그만의 패턴들, 도상들, 기호들이 겹치고 겹쳐 중층 결정된 화면으로부터는 색채와 형상의 가상 현실적(VR) 광휘를 체험할 수 있다. 시리즈 작품들 각각에서 우리는 그렇게 비물질적이고 가상적인 이미지의 물질화된 버전을 보게 된다. 완벽한 평면성과 그에 반해 숨 막히게 화려하고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풍요에 넘치는 이상남의 인공이미지들 간 직교(直交)가 거기서 일어난다. 그에 따라 서두에 내가 지적한 아이러니는 오히려 미학적 특수성이 된다. xy의 교직 운동이 작가만의 감각적 요새를 허물고, 그림 앞에 마주선 감상자 쪽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전시의 제목과는 달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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