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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본 미학. 비극의 패러독스 art und weise




앞서 세 편의 리뷰는 소주제로 보면 분할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드라마라는 허구의 작품을 통해 우리 삶에서 ‘나’와 ‘당신’의 존재방식, 사랑/관계 맺음이 어떠한지를 비춰보자는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드라마 속으로 깊이 감정이입해 들어가 허구적 서사를 재 각색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동시에 드라마의 상황과 현실의 유사한 사건들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현실 비판적 논조로 끌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형식적/구조적 차원과 특정 장면에 함축된/잠재된 의미의 차원을 횡단하면서 이 드라마의 가치를 풀어보고자 글을 썼다. 미학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메시지, 그리고 존재의 윤리학이라 부를만한 성찰의 요소들을 발견해보고자 한 것이다. 누군가는 드라마 한 시리즈 가지고 무척이나 거창하게 접근한다고 냉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세속적인 것 속에 관념으로 발전시킬 요소들이 있는 것이며, 그럴 때만 관념은 죽은 추상적 정신이 아니라 실체로서 힘을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요컨대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강한 메시지/의미/가치는 ‘나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성을 보존하는 가운데 사랑하는 당신과 행복하게 함께 하겠다’이다. 이것이 첫 리뷰부터 세 번째 리뷰까지 내가 꾸준히 강조했다고 생각하는,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관계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로부터 유의미하게 섭취해야 할 존재(있음, being)의 윤리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사회 속에서 서로 구속된 존재’라고 전제할 때 그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인간이 홀로 살 수 없고 공동체를 이루는 한 그 관계의 역학(자유와 구속)이 진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사변을 학술적으로 곱씹어온 내게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4회,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악장 스케르초에 부여된 ‘Frei aber Einsam;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를 송아가 졸업연주 후 준영에게 ‘Frei und Froh; 자유롭고 행복하게’로 변형해 말하는 장면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바로 그러한 관계의 역학을 대중문화 속에서 숙고하게 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던 것이다. 극본을 쓴 작가가 그렇게 음악적 서사에 덧입혀 쓴 대구(對句)의 메시지는, 시청자인 내게는 사실상 한 항(F-a-E)이 다른 항(F-u-F)을 부정하거나 극복하는 대립이 아니라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의 이행과 발전(음악적으로는 모듈레이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혔다. 이를테면 우리 각자는 자유롭지만 고독한 개인인데, 그 개인성을 어떤 경우에도 삭제하거나 유보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서로 함께 함으로써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의미.

그 의미가 사실상 16회 분량의 드라마 전편에 촘촘히, 하지만 하나의 결이 아니라 다성적인 박자로 가설돼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억나는 대로만 적어 봐도 넘칠 정도로 많다. 1화에서 송아가 “꼴찌”라고 오케스트라 편성에서 배제되는 장면부터 이미 그렇다. 지휘자는 엄연히 ‘서령대 기악과 오케스트라’라는 작은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가진 송아의 개인성과 거기 존재할 자유를 지휘의 구속력을 이용해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3화에서 준영은 마치 당구의 쓰리쿠션처럼 자기가 행위 하지 않은 일로부터 건너건너 짝사랑의 강제 종료는 물론 친구에게 커다란 상처까지 받게 된 송아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본인만 생각해요.” 그것은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회적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고통과 상처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그 전제조건으로부터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에 관한 말이다.

이 3화의 에피소드가 분명 드라마 제작진(극본을 쓴 작가만이 아니라 감독들, 이름 모를 스태프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그것은 두 연인의 이별, 이별 후 상실의 고통으로 각자 지극히 힘듦, 힘듦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가갈 수 없음, 그리고 다시 새롭게 서로의 사랑함(보통명사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한창 행해지는 중이라는 점에서 동명사 ‘사랑함’인)을 고백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다음과 같은 더블 플레이로 진행된다. 즉 스스로를 지킴(‘나만 생각할래요...이기적이어서 미안하지만.’)과 연인을 배려함(‘송아씨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우산을 줬어요....행복했었던 것 같아요. 그것으로 된 것 같아요...송아씨 반주하게 해줘요...준영씨 마음이 가는대로 연주해요...자유롭고 행복하게...’)이 대칭적 리듬으로 극을 분할하며 이끈 것이다.

그러다가 그 리듬은 최종적으로 16화에 이르러 서로가 서로를 너무 사랑함으로써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냈었고, 상대방을 힘들고 행복하지 않게 했었음을 깨닫는 단계, 그리고 그 각자의 깨달음이 자기 내부의 성찰에 멈추지 않고 서로가 제 사랑의 밀도와 깊이를 상대가 체감할 수 있도록 발화하고 행동하는 단계로 종합된다. 베를리오즈는 리듬을 “음으로 박자를 대칭적으로 분할하는 것”이라 정의했고, 멜로디에 대해서는 “연속적으로 들리는 상이한 음들이 다소 대칭적인 악구를 형성할 때 마련되는 음악적 효과”라는 설명을 부여했다(『베토벤과 아홉 교향곡』, pp. 20-21). 나는 클래식뮤직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에 정확한 대입은 불가능하지만, 베를리오즈의 리듬과 멜로디 정의를 드라마의 형식에 대입하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두 주인공의 자존감과 자유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구조 형성에서 하나의 음으로 상정돼 드라마 전편에 걸쳐 대칭적 박자로 진행된 리듬일 수 있다.

그 리듬이 한편으로는 센박과 여린박의 강세를 바꾸는 당김음 기법으로 전개되며, 드라마 밖 감상자를 극으로 끌어들이고(시청자/구경꾼의 시선을 넘어 강하게 감정이입하는) 애달프게 하고 충성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비극, 가령 바커스 축제 기간 동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보며 인간의 오만과 신이 지배하는 가혹한 운명에 머리를 쥐어뜯고 울부짖었던 시민 관객들처럼 말이다. 참고로 이러한 미적 경험을 미학에서는 ‘비극의 패러독스’라고 한다. 요컨대 관객은 비극이 가상적 드라마임을 알지만 그 인지를 정지한 채 드라마 속으로 감정이입해 들어간다. 그럴 때만 예술작품의 향유, 예술작품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드라마가 가상이고 허구라는 사실에 고정된 관객은 감정적 동요 없이 안전한 현실에 머물겠지만, 그럴 경우 그/녀는 결코 미적 경험에 이를 수 없다. 이 상호적 조건에 낀 역설이 바로 ‘비극의 패러독스’다. 그 점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우리가 깊고 진하게 감정이입했다면 그것은 그만큼 드라마의 가상성이 강도 높게 감상자를 끌어들였다는 반증이다.

다른 한편, 내가 강조하고 싶은 다른 대목은 앞서 줄기차게 강조해왔듯이 존재의 윤리학적 차원에서 봤을 때 주체의 개인성, 독립성, 단독성, 자유라는 궤도가 드라마의 전개 상 클리셰로 간단히 봉합되지 않고 끝까지 지켜진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최종 장면이 전체 극의 화자이자 관찰자 역할이었던 여주인공 송아가 고전음악 공연 기획자로서, 단독으로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씬인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거기서 드라마가 만족했다면 내가 이 길고 긴 리뷰를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쓰기 시작했더라도 결국 내가 바친 열정을 아까워했을 것이다. 별 의미 없는 일을 했다고.

그런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주체의 자유라는 궤도와 연인들의 공동체라는 궤도, 혹은 내가 앞선 세 번째 리뷰에서 썼듯이 “연인의 연인됨”이라는 궤도를 조성 바꿈으로 연결시켰다. 당신의 존재가 가장 자유롭고 빛나는 곳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하는 설정으로 말이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송아를 대기실과 무대의 경계선, 그 다른 퍼포먼스의 문턱에서 바라봐주는 준영의 모습이 바로 그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를 실연하지 않는가.

끝으로 이러한 구조를 구축한 드라마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자기화한 우리 감상자 또한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우리는 드라마를 현실과 분간하지 못해 감정적 휩쓸림에 먹히는 대중문화산업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비극의 패러독스라는 강한 예술적 기제의 등을 타고 넘으며 이기적으로 향유하고 기꺼이 서로를 공유하는 주체의 자리에 내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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