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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를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겨.... art und weise



* 우연히 촬영 현장을 목격하고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장면을 사진 찍은 것이 방아쇠가 되어 덕후 기질도 없으면서, 조건 없는 리뷰를 자발적으로 쓰게 됨.
방송국 드라마는 낯선 비평 대상인데, 이 드라마는 복합적인 의미로 좀 강렬하게 봐서,
또 그 드라마로부터 다양하고 깊은 생각을 자극 받고 있어서 글쓰기가 새삼 흥미로움. 

*극 중 모든 교수들이 극한의 빌런들로 묘사되던데, 내가 예술대 교수라는 사실을 자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SBS



After 극강ㅅㅍ, After 드라마 종영

https://gall.dcinside.com/brahms/48707


원래 클래식 좋아하는데 우연히 이 드라마 예고를 본 탓에 빠져들었다.

(베토벤이 내 젊은/고단했던 인생에서 유일한 힘이자 길잡이었던 때...하지만 음악 전공X, 음악 모른 채 듣는 단무지 리스너O:)

예고만으로도 장소, , 프레임 등 연출팀의 시각적인 표현력이 좋다고 판단했고, 제작진이 영상이라는 매체에 접근하는 톤 앤 매너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이끌었던 요인은, 진지하면서도 청아한 얼굴의 두 남녀 주인공. 아주 매력적이고 매우 우아해서.

 몇 회 본 후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이 드라마를 보고 있나 궁금해서 여기 디시 갤러리를 찾게 됐지. 하지만 주중엔 여유가 없어 여기서 뭘 못하고 내내 눈으로만 니네들 활동을 보다가, 처음 게시판 글 쓴 동기가 극 중 경후빌딩 촬영 씬 목도였다.

그즈음은, 드라마 내러티브 상 두 주인공이 서로 매우 좋아하고 아낌에도 엇갈리고, 오해하고, 상처 주면서 힘들어 하던 시기였고 덩달아 시청자인 우리가 안타까워서 앓던 때였어. 나도 그랬지.

그랬기에 경후 빌딩 앞에서 송아와 준영이 서로 활짝 팔을 벌려 포옹하는, 말 그대로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감싸안아주는 것 같은 장면을 몇 번의 리허설을 반복하며 촬영하는 상황을 발견해서 너무 반갑고 행복했어(사실 보통 때의 난 이런 촬영 현장 엄청 무시하는 인간, 쿨한 척 하는 인간 중 하나다)

나아가 퍼득 이 장면이 단원들에게 폭죽처럼 행복감을 터트려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

때문에 그순간 나는 그야말로 두 주인공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고, 상처 받고, 불안해하고, 흔들리고 있는 너네들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디시에 ㅅㅍ 텍스트를 써 올렸지. 나아가 인증을 하라고 해서 혼자만 보려했던(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방송에 영향을 줄까봐) 사진도 두 장 올렸다. 한 장은 너네가 어제부턴가(?) 드립 놀이하는 데 마구 쓰고 있는 경후빌딩 앞 준송 포옹씬(위 두 번째)이고, 다른 한 장은 촬영 스태프와 차량까지 찍힌 사진(세번째).

게시하고 나서 일단 엄청 난리가 난 것 같아서, 폭발적인 반응인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지만 놀라고 좀 공포스러웠다(ㅎㅎ)

그래서 초스피드로 삭제하고 상황을 끝냈지. 

어쨌든

"친구로서니까"라는 준영의 대사는 그렇게 내 현실의 한 순간 속에서 행동을 이끌어냈다고 말하고 싶어. 너네들에게 '친구로서' 드라마(의 전개상 필연적인 갈등으)로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어. , 이거 보고 당신들도 따뜻해지고 행복해지세요. 거기에 현장 스태프와 제작진 모두 힘내라는 뜻으로 말이지...이러저러한 시간이 지난 후 우린 15, 16회를 통해 또 많고 다양한 감정에 젖었고, 그보다 많은 생각에 스스로를 침잠시켰을 것이야.

나도 중요하고 바쁜 일을 끝낸 후라, 지난 일요일에 다소 무거운 주제로 리뷰도 썼고 말이지...;) 참고로, <[리뷰] 혼자됨의 고독한 자유에서 같이함의 기쁜 자유까지>.

이제 드라마는 잘 끝났는데, 너네들은 여전히 열심히여서 "안녕. 잘지내"라고 말하고 싶어 이렇게 메시지 남긴다. 선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찍은 다른 사진 한 장 공개해. 포옹 전 준영이 송아 기다리면서-오직 송아에게로만 향한 눈과 몸짓으로- 서 있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다.

그럼 안녕. 잘지내.



[리뷰] 1. 혼자됨의 고독한 자유에서 같이함의 기쁜 자유까지

https://gall.dcinside.com/brahms/43412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인간은 서로 구속되어 있다."(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오늘 우리 연주한 곡이요. F-A-E'자유롭지만 고독하게'라는 뜻이잖아요. 하지만 나는 준영씨가 자유롭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오늘, 같이 연주해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가요.........나중에 알았다. 그날 우리가 연주한 곡은 '자유롭지만 고독한' 소나타였지만 브람스가 좋아했던 문구는 'F-A-F, 자유롭지만 행복하게'였다는 것을."(<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채송아 대사)

 

독일어로 '아인잠 einsam'은 한국어로 '고독한'이라고 번역하지만 '하나(eins-)'라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리면 '혼자서'라는 뜻도 통한다. 그리고 '프로흐 froh'는 한국어로 '행복한'으로 번역 가능하지만 '기쁜'이라는 의미도 강하다. 그럼 극 중에서 채송아가 인용한 문구, 즉 브람스(1853년 슈만, 디트리히, 브람스 공동 작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3악장 스케르초에 부친 요하임의 모티프 'F-A-E(frei aber einsam)'는 대사처럼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로만 이해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요하임이 좋아해서 부여한 그 문구는 분명 브람스가 선호한 'F-A-F(frei aber froh)'와 대등하게, 그러면서 의미상 비약의 과정을 거쳐 다음과 같은 삶의 성찰이 되는 것이다. 내 식으로 바꾸자면 'F-U-F(frei und froh) 자유롭고 기쁘게'.

 

나의 고독함/혼자됨/개별성에 근거한 자유가 당신과 내가 "같이 연주"함으로써 생성되는 기쁨/행복의 자유로 나아갈 것이다. 전자의 자유와 후자의 자유는 결코 대립하거나 양자택일할 대상이 아니라 전자를 통해 후자가 성립하고, 후자에 의해 전자가 지속가능한 상호관계 항이다.

나는 송아와 준영 각자의 독립적 존재/주체성, 그리고 사랑의 상호작용/관계를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가치 있는 주제로 꼽고 싶다. 때문에 위 요하임과 브람스의 모티프를 내놓고, 적극적으로 의역할 것이다. 요컨대 그 말은 '힘들고, 상처 받고, 흔들리더라도 나의 길을 가겠다'에서 멈춰 서지 않는다. 오히려 힘들고, 상처 받고, 흔들리며 끊임없이 불안하더라도 나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당신과 같이 하는 기쁨의 길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나의 주체성과 당신의 주체성, 나의 존재와 당신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지키면서(선을 지키면서) 우리는 같이, 함께 삶을 수행할(performance)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자 나의 예술이, 또한 당신의 인생이자 당신의 예술이 공존하며 함께 가는 방법이다.'라고 선언한다. 아니, 드라마 속에서 '바이올린' 연주와 '피아노' 연주라는 미학 형식, '사랑'이라는 고전적 화두로 제시한다.

 

18세기 철학자(또는 "문학적 철학 텍스트"의 저자) 루소는 당시 시대의 흐름인 계몽주의의 인간 이성 대신 정념을, 아카데미에 귀속된 학문과 예술의 도착적(perverted) 발전 대신 자연을 근간으로 한 인간 정신과 행위의 공동체 모델을 주창했다. 그것이 내가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루소의 사회계약론 1절의 의미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지만, 사회라는 공동체로 나와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는 구속의 관계에 처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인간의 사회/공동체가 악의 구렁에서 멈추지 않는 것은, 그 관계가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되지만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공존하는 자유의 방식을 터득해나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상태를 그냥 두지 않는다. 인간은 억압과 착취 없는, 차별과 불평등 없는 아르카익 상태, 자연으로의 복귀를 위해 오늘도 자신의 "완성 가능성"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존재다.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특별히 좋아하고, 팬데믹으로 극한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의미 깊은 메시지라고 받아들이는(음악은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처럼)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거기서 나아가 정말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내용이 이상과 같다.



 

[리뷰] 2. 당김음: 돌연 모두 멈춰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기에-이별 속 멈춤

https://gall.dcinside.com/brahms/51085

 

"아뇨. 이제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밖에 비가 오더라고요. 송아씨, 악기 메고 있었는데..그래서 송아씨가 혹시 우산이 없으면 밖에 못 나가고 있을까봐...그래서 우산을 갖고 내려갔어요. 송아씨가 못 나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산을 줬어요. 쓰고 가라고요. 제가 매일 우산 갖고 다니겠다고, 송아씨는 비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었는데...제가 송아씨를 힘들게 했어요. 송아씨가 행복하지 않대요. 저 때문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5, 게네날 파우제: 돌연히 멈추고 모든 성부가 쉴 것, G.P., 박준영 대사)

 

"그렇대도 이 알레그로 악장[베토벤 E플랫 장조 3번 교향곡 Eroica 1악장]보다 더 진지하고 더 극적인 것이 있을까? 에너지 넘치는 힘찬 주제가 이 악장의 배경을 이루는데 처음에는 주제 전체가 고스란히 제시되지 않는다. 작곡가는 흔한 관례와는 정반대로 교향곡을 시작하면서 자기가 표현하려는 멜로디를 슬쩍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멜로디는 도입부 몇 소절이 끝난 다음에야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나타난다. 센박과 여린박의 순서를 바꾸는 당김음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약박에 강세를 줌으로써 3박자 소절에 2박자 소절을 여러 번 결합하는 리듬이 정말 대단하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Ludwig van Beethoven, 이충훈 역, 베토벤과 아홉 교향곡, PHONO, p. 53)

   

지난 번 리뷰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언급하며 드라마 속 두 주연의 사랑이 각자의 자유/독립성과 행복/동반자성이 병행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뜻을 썼어. 송아의 졸업연주와 준영의 반주에 요하임의 F-A-E와 브람스의 F-A-F를 포갠 다음, 한글로 '혼자됨''같이 함'이라는 표현을 더해서 말이야. 당시 복잡하게 썼지만 핵심은 사랑이란 어느 쪽이든 일방적이고 완전한 소유가 아니라, 두 독립적인 존재의 자유가 온전히 지켜진 상태에서 공존하는 행복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극 중 준영의 대사인 "적당히 사랑하라"도 그런 의미로 정교하게 해석할 말이라고 봐. 요컨대 결코 상대를 잠식하지 말 것. 동시에 자신을 소진하지 말 것. 결코 상대를 초과하지 말 것. 동시에 자신을 희박하게 만들지 말 것.

 

그럼 극 중에서 지나치게 사랑하게 돼 '자신을 사랑하기가 힘들어진' 송아와 그런 송아의 힘듦을 '다 내가 잘못했다'고 무조건 덮어주려는/가려주려는 준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단계를 어떻게 진행시켜야 서로의 독립된 자유를 고양시켜주면서 동시에 같이 함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성부가 돌연 멈춰야 한다는 게네랄 파우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지.

음악 용어 대신 문자 그대로 보면 독일어로 게네랄 파우제는 영어로는 general pause, 우리말로 풀어보자면 '모두 쉼'이야. 미리엄 웹스터 사전에서는 "앙상블 음악에서 모든 파트가 리듬 없이 쉼(a nonrhythmic rest in all parts in ensemble music)"이라고 정의하고 있지.

 

그러니까 진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도가 너무 넘쳐서 마음과 달리 균형을 잃고 망가져가는 상황을 깨기 위해서는, 나나 당신이나 일부러 나쁘거나 폭력적인 것이 아님에도(아니, 오히려 너무나 사랑하기에) 일이 잘못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는 (돌연이라고 할 만큼 강력하고 단호하게) 관성의 운동을 멈추고 침묵과 성찰로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지. 그 침묵과 성찰의 시간, 멈춤의 단계가 있어야만 사랑하는 나의 당신이, 그리고 당신의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 내 안에 갇히지 않고. 당신 안의 나에게 갇히지 않고 말이야.





[리뷰] 3. 당김음: 돌연 모두 멈춰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기에-되돌아갈 수 없음

https://gall.dcinside.com/brahms/51447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에서 송아와 준영, 두 주인공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이별한다. 극본과 연출이 겉으로는 여러 외부 요인을 가설했지만, 사실 그 둘의 관계가 끝나는 결정적 이유는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여주인공의 생각으로는 해도 해도 안 되는”(이하 따옴표는 모두 14, 15회 송아 대사)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유일무이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가 힘들어서” “행복하지 않다고 이별을 선언한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나와 맺고 있던 관계바깥으로 나가게 해주는 것이다. 그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마음이란, (어려움)를 피할 수 있도록 우산(당신이 내게 준 선물)을 정작 당신 손에 되돌려 들려주는, 비정해 보이는 행동이다.

다른 한편, 그 이별을 말하는 사람인 나는 그가 이전의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서”, 아직도 그의 마음이 따라가는데가 다른 쪽인 것 같아서 이제 그만해요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마음이 자유롭고 행복하게나아가기를 바라는 착한(그러나 분명 상대방에게는 생이별의 잔인함이 깃든) 마음이다. 그래서 우연한 마주침조차 피해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다. 조심히 가라고 그를 돌려세우는 것이다.

. 이렇게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딜레마에 빠진 두 사람은 어떻게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가? 앞서처럼 과정을 뒤로 돌려 예전의 나로, “내 마음이 지금보다는 덜 불안했던 때로, 힘들고 상처 받고 있었어도 혼자 잘 걸어가도 있었던 때로, 적어도 내가 어디로 걷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 방법인가?

그렇지 않다. 그 과거의 내가 정말로 잘 걷고 있었는지, 정말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는지는 논외로 하자. 그것이 방법이 아닌 이유는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임/고독에서 같이 하는 기쁨/행복의 경험 쪽으로 한참이나 깊게 전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답은 무엇인가? 오케스트라의 모든 성부가 돌연 연주를 멈춤으로써 전조(modulation)의 분기점을 만들어내는 게네랄 파우제처럼, 두 연인은 일단 서로에게 과도하게 치닫는 감정을 멈춰 세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이라는 단어를 쓴다 하더라도, 사실상 무척 고통스러운 감각이고, 지극히 비생산적인 상태이며, 무엇보다 너무 많은 반성과 너무 짙은 외로움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전면적 휴지기(general pause)’를 거쳐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아가 상대방을, 그리고 자신이 살고 싶은 세계를 새롭게 마주할 힘을 얻는다. 그 순간들을 통과해 쉼을 끊어낸 이후에야 나와 당신은 비로소 다시, 그러나 이전과는 같으면서도 다르게(반복하면서 차이 나게) 바깥 세계로 나설 수 있다. 여기서 멈춤멈춤을 끊어냄은 필수적인 한 세트다. 멈춤만으로는 죽음에 이르고, 멈춤과 그 상태를 깨뜨리는 의지 및 행위의 일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일체화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이라는 작은 내면, 당신 안의 나라는 왜곡된 주체성 바깥으로 나와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 자유로움은 아무리 좋아서라 해도 자신을 짓눌렀던 음악에의 콤플렉스, 예의바르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참함을 동반하는 자기 낮춤과 부채감, 상대를 배려하기에 감춰야 하는 마음의 그늘로부터 우선 자신을 보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만해지거나 뻔뻔해지는 일이 아니다. 우아함과 진중함을 버리는 일 또한 아니다. 우리는 우아한 존재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좇는다. 가장 중요하게는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그대로, 왜곡된 상이 아니라 침묵과 성찰의 거울에 비춰 본 후의 모습대로 꺼내서 상대방과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유와 성장은 거기서 시작한다.

극본을 쓴 작가와 연출을 맡은 감독은 매체 인터뷰에서 자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를 청춘의 성장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청춘은 당연히 중요한 지시어이겠지만, ‘성장이 반드시 특정 연령층, 특정 세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대로 삶을 살아가는 특별한 이들, 노회한 감각과 관성의 리듬으로 인생의 박자를 쳐대지 않고 매순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가령 학문과 예술. 연구와 창작은 내게 헌신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내가 그 일을 직업적 대상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주체로서 잘 되거나 안 되거나 하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그 상태를 문학의 공간에서 말했다.)을 분절시켜 세공하는 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성장이다.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현실의 나) 또한 그 중의 한 사람이기에 이 리뷰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읽느라 힘든 단원들에게 행복을!

 



 

[리뷰] 4. 당김음: 반지. 사랑의 관계...한 쪽은 홀로, 다른 쪽은 맞잡은 손으로

https://gall.dcinside.com/brahms/52317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는 전체 16회 분량이다. 그런데 주의 깊게 본 사람들이 많이들 포착한 것처럼, 이 드라마는 극본의 내러티브만이 아니라 시각적 연출 면에서도 꽤나 대칭구조를 애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줄거리 상으로 앞과 뒤의 이야기가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는 경우가 다수 발견되고, 음악의 선곡도 그러하며, 미장센을 구축하는 방식에서도 그러하다.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 사례는, ‘()’을 통해 등장인물들 간의 물리적 관계는 물론 심리적 거리를 은유한 장면들이다.

 

그런데 나는 특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고전음악사의 에피소드를 가져다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만들어낸 대구에 주목하고 싶다. 의도했을 수도 있고, 우연한 결과일수도 있다. 또 실제 드라마보다 해석의 시선이 강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제작진은 요컨대 베토벤과 슈만, 이 두 작곡가의 개인사, 특히 러브 어페어가 배면에 깔린 음악을 선곡해 드라마 속 두 남녀 주인공의 서사에 덧입힘으로써 3회와 16회에서 로맨틱한 대구를 만들어낸 것 같다.

 

먼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월광 소나타(Mondscheinsonate)’. 그 곡은 3회 끝부분에서 송아의 짝사랑이 허무하게(동윤과의 관계가 이뤄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감정이 자기가 행하지 않은 원인으로 강제 종료되기에) 끝난 상황, 깊이 상처받았을 송아를 위로하기 위해 준영이 선택한 곡이다. 그는 이미 앞서 다른 자리에서 송아가 그 곡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말이 아니라 음악으로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그런데 월광은 사실 베토벤이 평생 불멸의 연인으로 마음에 간직했던 여인,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곡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줄리에타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결실을 맺을 수 없었으며, 그녀는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벤첼 로베르트 폰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 그러므로 베토벤의 월광은 미완의 사랑이 만들어낸 음악적 성취, 홀로 된 사랑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악적 헌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 소나타는 고독한 예술가의 정념과 고통이 빚어낸, 그러나 지극히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선율로 풀어낸 음악의 승화라 할 수 있다.

반면, 슈만의 성악곡집 <미르테의 꽃> 중 첫 번째 곡인 헌정(Widmung)’은 전혀 다른 서사를 갖고 있다. 스승이자 연인의 아버지였던 프리드리히 비크가 결혼을 반대했기에 몇 년에 걸친 소송까지 감내해야 했던 슈만과 클라라. 하지만 두 사람은 그 힘든 시기를 겪어냈고, 비로소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관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슈만의 비드뭉은 바로 그 결혼식 전날 밤 미래의 신부, 그러나 통상의 신부가 아니라 나의 영혼이자 나의 심장이며, “나의 기쁨이자 나의 고통이어서 결국 그 안에서 내가 살아가는 나의 세계그 자체인 한 여인에게 바치는 연가다. 나아가 보다 나은 나라고 까지 해야 할 어느 절대적 존재를 향한 숭고한 고백이다.

 

이렇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 얽힌 서사와 슈만의 헌정을 감싸고 있는 서사를 두 대극으로 가로질러 보라. 그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대중 드라마 속에서 은밀하고 비애미 넘치게 세공된 사랑의 불/가능성이 아닌가? 아니, 이렇게 말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이뤄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홀로인 존재의 사랑홀로됨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벗어난 존재들의 사랑의 문제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연인의 연인됨이란 무엇일까?

전혀 다른 두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물질적/신체적으로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반지다. 그것은 둘이 각자의 손가락에 끼우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연인들의 반지란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가장 친밀하고 깊은, 유일무이한 공동 관계를 가장 심플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만들어주는 의미의 집합체이기도 하다(모든 예술의 역사 속에서 운명불멸로 심미화됐던 그 관계,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 이해타산으로 맺어지는 그 관계). 물론 바로 그 반지가 얼마든지 한 순간에 소유구속’, ‘배신부정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

그래서 요컨대 핵심은 연인이든 부부든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각각 왼손 약지 손가락에 나눠 끼는 반지가 그만큼의 개인성(individuality)과 단독성(singularity)을 확보해야만 투명한 사랑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내 존재가 숨 막히고, 내 손가락에 맞춰진 당신의 삶이 일그러진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의 16회 엔딩에서 준영은 송아에게 반지를 끼워준다. 시청자인 우리는 그 반지가 어떤 의미의 기호인지 직관적으로 알지만, 실제로 어떤 목적과 기능을 하는지(커플링? 약혼? 청혼?)는 알 수 없다. 의미를 설명하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반지의 오롯한 의미, 진정한 자신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는 보통 사람들의 습관을 벗어던지고, 연인 송아의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준 것이다. 심지어 그 행동은 오로지 바이올린이 좋아서, 그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경영대와 음대 학부를 두 번 다닐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인내심 강하게 자기 청춘을 닦아온 송아 본인조차 주의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끼워줄게요라고 말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자신의 왼손을 내미는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세상의 관습, 보통의 연인들이 취하는 질서를 따랐다. 그런 송아의 왼손을 준영은 부드럽게 어루만지지만, 이내 오른손을 바꿔 잡고 반지를 끼워준다.

이 짧고 미세한 행위에서 감상자는 어떤 메시지를 받아드는가? 단언컨대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포용적인 연인의 연인됨이다. 데이트폭력이 난무하는 이 험악한 현실과 비교하면 그 화면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안타까울 정도로 시적이다. 결국 드라마가 묘사하는 따스한 제스처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작은 행위는 연인의 존재를 무한 긍정하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 센 태도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두터운 메시지를 담은 약속의 징표다. 이를테면 바이올리니스트 채송아님"을 존중한다는, 당신이 직업으로서 바이올린을 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게 당신은 한 명의 연주자로 여전히 두 발을 땅에 딛고 우뚝 서 있다는 말을 함축한 것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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