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질 비물질) 미술 3





                                    Bas Jan Ader, I'm too sad to tell you, video, 1971



                            
                                    Bas Jan Ader, In search of the miraculous, 1975.

 




현대 (물질 비물질) 미술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월간 미술세계 2013년 2월호. 

 

미술관 벽에 조용히 걸려있는 그림. 좌대 위에 기념비적으로 서있는 조각. 우리가 얼마 전까지 관습적으로 떠올리고 편하게 받아들여 온 미술은 이 같이 간명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현대미술이 반미학적 실천과 비규범성 및 예측 불가능성의 영역을 표방하며 변모와 확장을 거듭해왔다 할지라도 그렇다. 그 범위에서 ‘미술’은 곧 오브제 형태의 유일무이한 작품들과 동의어였다. 또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 고유한 질, 무게, 크기, 형체, 색깔 등의 외관 및 속성을 현실에서 유지하는(특히 미적이라고 인정받은) 대상 일반을 지칭했다.

하지만 여러분이 최근 십여 년간 한 번이라도 ‘비엔날레’ 같은 대규모 국제미술 전시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면, 앞서 말한 미술의 범위에 들지 않는 것들이 오늘날 전시장 안팎을 채우고 전시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온-오프라인의 질서를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제 미술관 또는 갤러리 벽에는 전원이 꺼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빛 영상이 흘러넘친다. 또 때만 되면 곳곳에서 일시적인 이벤트와 해프닝이 벌어졌다 사라진다. 물론 그런 변화는 굳이 비엔날레를 가지 않아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시각 환경이 바뀌는 데서 또한 감지할 수 있는 점이다. 이를테면 천편일률적인 모양새의 공공조각품이 설치되는 대신 도시의 가로 및 건축물 내 외벽을 디지털 미디어 파사드가 장식하고, 네온이나 형광등 또는 LED 전구가 발산하는 빛 자체가 미술로서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명멸한다. 전시 관람객에게는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거나 피부로 감촉하고 코로 냄새 맡는 일이 곧 미술 향유인 상황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또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통해 작품의 제작 혹은 제시 과정에 간섭해줄 것을 요청 받기도 하고, 텔레커뮤니케이션으로 누군가 또는 무엇과 상호작용해줄 것,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가는 퍼포먼스나 플래시 몹(flash mob)에 참여해줄 것을 독려 받는다. 그것이 곧 동시대 미술의 창작 문법, 프레젠테이션 방식, 감상법이라는 전제와 흐름에 따라서.

우리의 관습적 사고와 감각의 범위 안에서는 여전히 조형예술에 근간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미술이 위와 같이 변화하고 이질화하는 현상에 관해 논자들은 특정한 기준을 들어 이행의 전과 후를 가늠하고는 한다. 예컨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같은 미술사학자이자 비평가는 ‘매체 집중성에서 다변화 과정’의 문제로,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같은 큐레이터는 ‘작가, 작품, 감상자 사이의 관계’ 문제로,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같은 매체이론가는 ‘광학기술에 의한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제로 그 테제를 풀이했다. 여기서 그 각각의 이론과 주장을 논쟁하기보다, 우리는 예의 논의들을 염두에 두고 현대미술의 이행을 보는 다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상황의 복합적인 면모를 파악해보기로 하자. 요컨대 ‘물질 중심의 미술과 비물질 또는 탈 물질화하는 미술’이 그 다른 기준이다.

 

얼굴은, 시간은 작품의 재료인가?

정확해질 필요가 있다. 어떤 작가가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향한 채 연신 자신의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간혹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하면서 비애에 젖은 얼굴을 보여줄 때, 가령 그것이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재료는 무엇인가? 작가의 얼굴? 그의 눈물? 그의 슬픔? 작가의 실존 전체? 아니면 그 특정한 행위 장면을 기록한 필름? 그도 아니면 ‘한 인간이 운다’는 사실과 그 실제 사건이 한 편의 영상작품으로 편집된 시간? 답은 간단하다. 그 모든 것이 작품에 투여된 재료다. 동시에 그 모두가 각각의 요소로 재분리 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품 속에서 긴밀하고 중층적으로 구성되고 상호작용한 질료들이다. 그 점에서 하나의 작품에 어떤 것은 물질적이고 어떤 것은 비물질적인지 따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작가의 얼굴 또는 한 인간의 현존을 천으로 짠 캔버스나 돌덩이와 한통속으로 묶어 작품 재료라 취급하기에는 저항감이 있다. 또 눈물방울이나 흐르는 시간을 유화물감이나 철판과 동일한 질료의 범주에 넣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철학적으로 말해서 한쪽이 존재(being)라면, 다른 한쪽은 한갓된 사물(thing)이기 때문이다. 또 한쪽이 유동적이거나 가변적이며 정서적이거나 추상적이라면,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동사 또는 형용사 혹은 부사라면 후자는 명사다. 이 같은 차이들 때문에 우리는 앞서 예시한 작품, 즉 작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화가의 초상화나 조각가의 자소상과 동질적인 미술로 재단할 수 없다.

대신 이 대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 인간이 관념이 아니라 물질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한 그 어떤 미술도 물질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질료의 조형적 승화든 정서의 표현이든 일단은 물질로부터 출발하되(기초재료 또는 도구로 사용하는 데서부터 영감 혹은 관념론적 주제를 제공하는 근원으로서), 어떤 작품은 물질의 차원을 고수하고 어떤 작품은 비물질적인 속성을 잠재하거나 새로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에 근거해 작품의 미학적 속성을 가늠하고, 미적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다. 요컨대 기능 면에서 작품의 재료이거나 구성 면에서 작품의 질료라고 할지라도 어떤 것은 비물질적인 차원에 속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은 물질적인 차원에 속함을 구분하는 일이 요구된다.

다시 예의 눈물 흘리는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네덜란드 출신 작가로 1975년 <기적적인 것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miraculous)>라는 프로젝트 실행 중 대서양에서 사라져 현대미술사의 미스터리가 된 바스 얀 아더(Bas Jan Ader)는 개념미술가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꼽힌다. 그런 그가 71년에 ‘슬픔’을 주제로 수행한 작업이 좀 전에 예시한 퍼포먼스다. 그것은 <당신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슬퍼요(I'm too sad to tell you)>라는 제목의 비디오작품으로 남겨져 있다. 헌데 우리는 이 작품 속의 물리적인 측면과 비물질적인 측면이 상호 결합하면서 특정한 감정 상태를 작품으로 구현하고, 감상자에게 예술적 파토스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자. 작가의 얼굴 및 거기 그렇게 있음(더 세부적 요소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눈물)이 물리적인 측면이라면, 시간의 지속 및 영상화는 비물질적인 측면이다. 그리고 그 두 측면은 하나의 비디오작품으로 조직돼 보는 이로 하여금 비애감, 침묵의 정조처럼 유형의 물질성분으로는 헤아릴 수 없고 논리로도 따질 수 없는 정념을 즉자적으로 경험케 한다. 오래전 그의 눈물이 마르고, 그가 실종됐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제13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주 전시장인 프리데리치아눔 1층을 메운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작품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의미가 필요해(I need some meaning I can memorize)>는 아더의 작품처럼 내면의 정서에 관여하기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지각을 목표로 한 작품이다. 처음 전시를 보기 위해 들어선 관객에게 프리데리치아눔 1층은 그저 텅 빈 홀로 비춰진다. 하지만 무엇을 봐야하는지 의아해 하는 그 관객의 머리카락이 어느 순간 살랑거린다. 또 유럽의 여름, 전시장 밖의 더운 공기에 지쳐있던 피부가 신선해진다. 자기 자신만 그런가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커다랗게 비어있는 홀 곳곳에서 사람들이 말 그대로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때 관객들은 서로 서로를 보며 비로소 어떤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이 바람,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이 바람이 바로 작품’이라고. 갠더가 작품으로 제시한 미술은 전시장에 설치된 공조기를 통해 불어오는 바람,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바람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바람이 일렁이는 공간에 관객들이 들어서고 거닐면서 바람은 가시적이 되고 미적으로 지각 가능한 형상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갑자기 살갗 위로 느껴지는 청명한 공기에 호기심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실시간으로 온전히 갠더의 작품이 된 것이다. 그 점에서 작가가 작품 제목에서 말한 ‘기억할 수 있는 의미’란 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몸이 경험한 바, 몸에 새겨져서 언제고 유사한 자극이 있으면 기억해낼 수 있는 의미일 것이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그려진 ‘무의지적 기억’처럼.

사실 이와 같은 점에 비물질성을 향해온 현대미술의 핵심 충동이 있다. 관념미학적인 미술의 자기 지시성에 고착되기를 벗어나, 끊임없이 일시적이고 감촉적인 지각경험의 역학 장(force-field)이 되고자 하는 충동 말이다. 신체와 감정의 제스처, 쌍방향의 자극과 반응, 느낌의 스펙트럼, 형형색색의 뉘앙스, 잠재적/가상적 에너지의 난무. 그 장에서는 이내 휘발되는 눈물뿐 아니라 소리 ․ 냄새 ․ 빛 ․ 바람 ․ 열 ․ 수증기 ․ 향기 ․ 전자 신호 및 데이터 같이 애초 가시적이지 않거나 형태 없고 질량 없는 것들이 미술의 주요 질료가 된다. 또 듣기 ․ 더듬기 ․ 걷기 ․ 달리기 ․ 울기 ․ 웃기 ․ 싸우기 ․ 춤추기 ․ 맛보기 ․ 배회하기처럼 시각에만 한정되지 않는 다종다양한 실천과 생산/비생산적 경험 활동이 미술의 ‘즉흥적 본체’이자 감상의 ‘한시적 실체’가 된다(비록 논리로는 모순이지만 말이다). 결정적으로 이는 물감, 캔버스 또는 종이, 대리석, 석고, 브론즈, 대지, 심지어 뒤샹의 레디메이드 자전거바퀴까지, 현실세계의 각종 물질을 쓰면서도 작품은 궁극적으로 가상의 미, 절대성, 숭고, 지적 개념 등 고도로 비물질적인 차원을 지향했던 모더니즘미술과 역방향을 달리는 미술이다. 그 자체로 비물질적이거나 비물질에 가까운 요소들을 채택해 더욱더 세속적이고 구체적인 경험 지각의 미술을 이뤄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복합적 현존, 새로운 부조리의 세계

작품(업). 개념. 과정. 상황. 정보. 이것들은 1969년 큐레이터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이 스위스 베른 쿤스트할레에서 영국 런던 ICA까지 순회 기획한 《당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것: 태도가 형식이 될 때(Live in Your Head: When Attitudes become Form)》전을 통해 내세운 미술의 주체/대상들이다. ‘작품(업)’이라는 익숙한 미술 구성원에 더해 그가 새로이 제시한 네 가지 주체 혹은 대상은 1960년대 비단 특정 작품 군(群)만이 아니라, 미술의 일반 문법부터 전시 행태 및 향유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에서 변화하던 현대미술의 지형을 압축 표상했다. 제만은 그즈음 시각과 물질 중심의 예술 오브제, 손기술에 기반을 둔 미의 완성, 작품을 통한 미의 추체험을 근간으로 구축돼온 미술의 미학을 지각 변동시키는 주요 인자로 그 넷을 꼽은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제만이 가시성의 안팎으로서 개념, 작품의 생성과 소멸 및 이행과 변이로서 과정, 사건의 발생이자 지각의 불연속으로서 상황, 일시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으로서 정보를 도입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전시에서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가 미술관 앞 공공도로를 무거운 쇠구슬로 깨뜨리는 도발적이고 위험한 퍼포먼스(또는 대지미술)를 실행했고, 그 미술이 주위 사람들에게 문자 그대로 지각의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베른 시당국 관리들과 심리적/행정적 갈등을 빚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우리의 해석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해준다.

미술관/박물관, 그리고 미술사의 존립이 소장 가능하고 기록에 용이한 오브제 형태의 작품에 기초한다 할 때, 미술을 비물질화하거나 탈 물질화하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그 미술제도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특정 사물 및 자료를 진정한 미적 가치 및 역사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공인하고 기념하며 보존하는 그 미술제도는 비가시적인 논리를 가시화하고, 비물질적인 체제를 물질들을 통해 현현하는데, 그 방향을 뒤집을 경우 현실의 미술제도가 가진 무형/비물질성/모순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의 ‘의도된 가상과 허위와 복제의 미술관’ 미술이 가장 탁월한 예다. 그는 1968년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19세기 섹션(Musée d' 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s, Section ⅩⅨéme Siècle)》을 기점으로 공인된 미술관이 아닌 사적 공간, 소장할 수 없는 작품 (아닌) 작품, 시시때때로 내용이 변하는 전시, 자의적인 배치 및 제시 방식을 강조하는 한시적 설치미술을 세상에 내놓았고 스스로 소멸시켰던 것이다.

정확히 인과관계를 검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현대미술이 해를 거듭하고 새로운 모색을 이어온 과정에서 특히 현실의 물질성 및 시공간적 조건을 벗어나 탈 물질화내지는 비물질화의 길을 택한 데는 위에 언급한 제만의 전시기획이나 작가들의 도전적 미술이 끼친 영향이 컸다. 하지만 오늘 여기 현대미술의 탈 물질화 또는 비물질화 경향은 미술 내부 맥락에 한정된 지적 개념이나 정보, 물리적인 시간의 단속(斷續) 및 미술제도의 정치학적 전개로서 상황과 과정을 넘어서고 있다. 그 넘어섬의 가장 큰 동력은 테크놀로지의 고도화와 매체의 확장 및 복합화이다. 우리 대부분이 겪고 있다시피 지금 여기의 기술력은 착실하게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일을 멈춘 지 오래다. 대신 LTE(Long-term evolution) 속도로 하이퍼 리얼리티를 산출해내면서 우리를 예측 불가능한 경험세계로 끌어당기고 있다. 이제는 예를 들기에도 진부한 각종 디지털 기기들과 복합 미디어들이 그 산출의 수족 역할을 하고, 그 끌어당김의 날개로 작동한다.

이런 급변하는 현실 상황 및 인간 지각의 역장에서 작가들은 더 이상 배타적인 예술 장르나 양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떠한 기술공학이나 자본에 대해서도 ‘예술의 순수성’ 따위를 내세우며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그것들과의 적극적이고 깊숙한 공조 및 협업을 통해 기존 미술의 유형을 정교하게 빗나가려 한다. 동시에 일상의 범속한 물건이나 경험과도 미세하게 수준 차가 나는 작품을 내놓으려 고군분투한다. 여기서 정교한 빗나감과 미세한 수준 차가 무엇보다 핵심 타깃이다. 즉 기존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의식적이고 계산적으로 벗어나는 운동과, 일상적이기는 하되 결코 ‘일상 그 자체’에 매몰되지는 않는 차이의 생산이 관건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쟈넷 카디프 & G. B. 밀러(Janet Cardiff & George Bures Miller)가 카셀 도큐멘타 13에 선보였던 <오래된 기차역 비디오 걷기(Alter Bahnhof Video Walk)>를 들 수 있다. 도큐멘타에서 미술전문가에게든 일반 관람객에게든 가장 높은 주목을 받았던 출품작 중 하나인 그 작품은 사실 언어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형식 및 성질을 갖고 있다. 감상자가 카셀 시내 중앙역을 찾아가서 꽤 긴 시간 줄을 섰다가 체크 아웃 부스의 자원봉사자들로부터 아이팟과 이어폰을 받아들고 전원을 켜야 비로소 작품이 발생하는 미술. 감상자가 오직 그 두 전자기기에서 송출되는 시각이미지와 사운드에 눈과 귀를 의존한 채 그 이미지를 따라 실제 기차역 내부 공간을 20~30여 분간 배회하게 되고,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카메라가 촬영한 그때 거기 사람들을 마주하며, 무작위처럼 브라스밴드의 연주와 발레리나의 춤과 개짓는 소리를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로 체험하게 되는 미술. 어떤 문장도 이런 미술의 구조를 총체적이며 낱낱으로 분석해낼 수 없다. 또 그 어떤 비평도 이런 미술을 통해 그 시간, 그 자리, 그 지각의 조건에서 비선형적인 자극을 경험한 사람들의 의식 및 감각(현실 시공간과 실제 세상의 사건에 대해서는 그 순간 눈멀고 귀먹은)을 온전히 서술해낼 수 없다. 추체험을 원한다면 인터넷에 접속해(www.cardiffmiller.com) 비디오 클립을 보는 일이 백배 낫다. 어쨌든 그 온전한 서술의 불가능성은 언어의 무력함이나 언어로 표상할 사물/물질의 현실적 부족 때문이 아니라 <오래된 기차역 비디오 걷기> 같은 작품이 가진 공학적 현존성, 주체-타자의 뒤얽힘, 예술과 기술 자본의 결합력을 ‘선형적인 말과 인과성에 묶인 사물’이 따라잡을 수 없다는 데서 온다. 그에 더해 이 같은 속성들이 감상자 각자의 몸과 내면에서 실현되는 양상을 미리 또는 사후적으로 재단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비물질화 또는 탈 물질화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최근의 현대미술은 20세기 초 유럽의 다다나 초현실주의 운동과는 다른, 그보다 더 중층적인 부조리(不條理, irrational)의 미적 세계를 우리 앞에 끌어오고 있다.






Ryan Gander, I need some meaning I can memorise(The invisible pull), 2012.
photo: http://artobserved.com/2012/06/kassel-quinquennial-exhibition-documenta-13-opens-in-kassel-on-june-9th-to-run-through-september-16th-2012/
http://dossierjournal.com/blog/events/documenta-13/ 


Janet Cardiff & George Bures Miller, Alter Bahnhof Video Walk, 2012.
photo: http://esferapublica.org/nfblog/?p=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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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3/02/24 15:5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24 20:1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2/24 22:1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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