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황혼 6






* 아래 글은 월간 아트 인 컬처(art in culture) 2012년 11월호에 쓴 것입니다. 잡지에 실린 최종 글은 편집부가 제목 및 토씨 정도를 몇 군데 수정한 것인데, 여기서는 원고를 수록해 놓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글을 10월 23일 퇴고해 잡지사로 보내고, 28-30일 제1회 세계비엔날레 포럼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내가 쓴 글의 내용(즉 현대미술의 우세 종으로서 비엔날레의 파워와 반대로 자체의 난점)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수십 개 비엔날레 주최측/관계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각자의 자기 성찰과 새로운 비엔날레에 대한 각오를 통해서.(제1회 세계비엔날레 포럼에 대한 리뷰도 썼는데, 이 글은 예술경영지원센터 웹진-아래 링크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webzine.gokams.or.kr/01_issue/01_01_veiw.asp?idx=992&page=1&c_idx=54&searchString=



현대미술의 황혼

 

 

2012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그리고 카셀 ․ 프랑크푸르트 ․ 쾰른 ․ 베를린 ․ 하노버 ․ 헹크 ․ 앤트워프 ․ 암스테르담에서 광주 ․ 서울 ․ 대구 ․ 부산까지. 나는 그 기간 동안 그처럼 많은 도시를 돌아다녔다. 들인 시간은 길고 헤매고 다닌 공간은 넓었지만, 이유는 하나다. 그 시간 그 곳들에서 <7회 베를린비엔날레>, <13회 카셀 도큐멘타>, <9회 마니페스타> 등 대규모 국제미술전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메이드 인 저머니 2(Made in Germany 2)>, <클래스 올덴버그. 60년대(Claes Oldenburg. The Sixties)>, <지미 더햄(Jimmie Durham)> 등 중요한 기획전들이 있어, 나는 소위 ‘현대미술전문가’로서 그것들을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자, 그렇게 해서 무엇을 봤는가? 나는 저물어가고 있음에도 특이한 열성과 생기발랄함으로 연명하는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의 한 주기(週期)를 본 것 같다. 혹은 현대 미술계의 황혼을 절감한 것 같다.

 

공위(Siege)? 퇴각(Retreat)?

알다시피 ‘비엔날레(biennale)’는 2년을 주기로 열리는 행사를 지칭하는 이탈리아어다. 하지만 글로벌리즘의 문화예술 산업 버전으로 쓰이는 그 단어는 특히 시각예술분야에서 열리는 모든 대규모 국제미술행사를 총칭하는 대표명사가 됐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비엔날레’ 하면, 그것이 몇 년에 한 번이든, 국내든 국외든, 순수조형예술에 입각하든 다원적인 예술을 보여주든 간에 행사조직위원회가 있고, 예술 감독과 커미셔너가 위촉되며, 국제적으로 다수의 참여 작가들이 선정되고, 장르를 불문한 수많은 작품들이 방대한 전시공간에 장기간 펼쳐지면서 대중 관람객을 끌어 모으는 큰 예산 규모의 미술행사를 떠올리게 됐다.

그런 비엔날레를 두고 한쪽에서는 무용론과 폐지론을 끈질기게 제기한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오늘 어떤 지역에서 새로운 이름의 비엔날레가 첫 번째 개막식을 열고, 어떤 지방은 내년부터 비엔날레 사업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공식 선언한다(예컨대 한국의 경우 10월 26일 창원에서 제1회 조각비엔날레가 열리고, 얼마 전 강원도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실현시키자는 취지에서 내년부터 비엔날레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IFA(The Institut für Auslandsbeziehungen)와 공동주최로 10월 27일~31일까지 <제1회 세계비엔날레대회>를 개최한 데서 보듯이, 비엔날레는 이제 엄연히 하나의 고유한 예술 제도이자 당대 미술의 종합 공론 장(場)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렇듯 비엔날레에 대한 부정적 판단과 의식적 기대, 그리고 광폭의 다각적인 활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요컨대 동시대 시각예술문화산업의 복마전에서 비엔날레가 우세 종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싫든 좋든 이미 최고 관심의 자리를 꿰차고 있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지속적으로 사건이 발생하며, 생산적이든 그렇지 않든 다자(多者)의 말들을 압도하며 열리는 우세한 모델로서 비엔날레라는 말이다. 그 때문에 비엔날레는 비판적 전문가들의 문제제기 또는 대중들의 수동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문제제기와 반응을 일종의 양분 삼아 더 많이, 더 당연하다는 듯이 열리고 더욱 더 힘을 확장해가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비엔날레가 독점하는 현대미술을 향한 관심과 파워의 집중이 아니다. 가령 그렇다 하더라도 비엔날레가 대변하는 각종 국제미술행사들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예술을 제시하고, 그 예술의 가치와 역할이 배타적 미술(인/계)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세적 삶 및 과거 ․ 현재 ․ 미래의 역사를 향해 열려 있다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가치 지향은 뻔한 얘기지만, 실제로 실현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언제나 새롭다). 정말 문제적인 것은 우세 종으로서 비엔날레의 메커니즘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가운데, 우리가 그것이 아닌 다른 미술 모델, 그것이 아닌 다른 예술 활동의 가능성을 점차 상상하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그런 운동 역학이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동안 지속되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비엔날레 유형 미술의 당연성이다. 또 그런 유형화의 반복 안에서 정지된 채 출구를 못 찾고 헤매고 있는 현대미술의 황혼기 모습이다.

올해 카셀 도큐멘타 13(dOCUMENTA (13))은 내게 그 같은 현대미술의 속성과 처지를 꽤 적나라하게 일깨운 전시였다. (참고로, 나는 여기서 올해 열린 국내의 여러 비엔날레를 비중 있게 논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 그것을 평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제기와 논의를 위한 대표성’이 비평의 한 기준이라 할 때 ‘비중 있게 논하지 않는 것’ 또한 그 자체 비평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미술가 190여명을 포함해 자연과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철학자, 작가 등 약 300명의 전시 참여자. 독일 카셀시의 16개 전시 장소는 물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아프가니스탄 카불, 캐나다 반프 등 국가를 넘어 도시를 횡단해 엮인 총 30여 곳의 행사장. 현대미술작품만이 아니라 과거의 거장이나 주변부 미술가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고, 과학-정치학-사회학과 연계한 미술이론 워크숍, 대중 강연, 세미나, 스크리닝, 퍼포먼스, 심지어 최면술까지 포함된 방대하고 다양한 프로그램.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수잔 벅-모스(Susan Buck-Morss),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도너 헤러웨이(Donna Haraway) 등 각계 쟁쟁한 전문가들이 쓴 100편의 글로 이뤄진 “책들의 책(The Book of Books)”이라는 이름의 도록. 이상과 같이 헤아리기에도 벅차고 감히 선별해 보기에도 송구한 카셀 도큐멘타 13에서 현대미술이 특정 예술의 유형화에 빠진 상태, 혹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자기 자신에게 포위된 현대미술을 봤다니? 그 무슨 어깃장인가?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공들인 것에 괜한 어깃장 놓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엄청난 인력과 에너지와 노력, 다종다양한 시도로 점철된 이번 카셀 도큐멘타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그 인력과 에너지와 노력과 시도가 노정하는 현대미술의 한계를 봤다.

그 한계란, 예술 실천을 공동체 내지는 정치사회적 삶의 지평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모토 아래 진행된 근래 현대미술의 자기모순을 말한다. ‘커뮤니티 기반 미술’, ‘관계성의 미학’, ‘도큐멘테이션, 리서치, 아카이브 중심의 미술’, ‘개입, 저항, 참여, 공유의 미술’ 등 그 이름도 어렵고 화려한 현대미술의 최근 실천-경향들이 카셀 도큐멘타에서는 마치 결정판처럼 펼쳐졌고 시행됐다. 관객은 그 실천-경향들을 카셀의 비디오 스크린에서, 수많은 전단지와 드로잉과 유사(quasi) 문서고 자료와 각종 민족지학적 오브제가 뒤범벅된 설치작품에서 쉴 새 없이 마주쳤다. 또 온갖 퍼포먼스와 워크숍과 강연 자리에서 그런 종류의 비판적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새겨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지는, 모더니즘 회화의 아류가 추상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만큼이나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카셀의 그것들은 ‘예술과 사회의 통합’이라는 아방가르드의 오래된 모토를 부흥시키려 하거나, 최근 십년 간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사회 참여적 미술을 후렴구로 재생산하는 양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이번 도큐멘타는 예술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는 일을 사회 내에서 예술 헤게모니를 쥔 미술제도가 자처할 경우 얼마나 손쉽게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지 꽤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75년에서 90년까지 레바논에서 벌어진 시민전쟁 기간 동안 군부의 폭격으로 훼손된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소장품을 그곳 출신 시인이자 미술가(Etel Adnan)의 프로젝트라는 명분으로 대여해, ‘세계 최초 공공미술관’으로 꼽히는 카셀 프리데리치아눔(도큐멘타의 주 전시장)에 진열한 설치작품이 정말로 전복적인가? 그 구도는 강대국이 주변국가 내전(內戰)을 공공연히 비난하며 막후 지휘하는 양상, 또 모범생이 학급의 꼴통에게 그 아이의 집안 문제를 같이 고민해주겠다고 부추겨 털어놓게 하고 다른 얘들로부터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는 모양새와 좀 닮아 보인다. 그럼 모더니즘 회화세계의 단독자로서 지오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di)가 일평생 칩거하듯 그린 정물화와 그의 작업실에 놓여있던 꽃병 등 유품을 끄집어내 다른 문화조건과 시공간을 가진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 큐레이션이 주목할 점인가? 정말 그런 기획술이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기예프(Carolyn Christov-Bakargiev) 예술 감독이 “뇌(Brain)”라는 키워드 아래 보여주려 한 바, 역사에서 탈구되고, 파괴되고, 도둑맞았거나 은폐된 사물/작품의 “사회적 삶이 가진 복합성, 강도, 이질성을 상찬”하는 탁월한 방식인가? 동양과 서양 간의 문화, 정치, 젠더, 종교 차원의 복합적인 이중성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카더 아티아(Kader Attia)의 아프리카 민속 공예품과 식민제국주의시대 인종학 사진을 병치시킨 거대 설치작품이 정말로 과거 서구가 야기한 세계사적 문제를 두고 서구 스스로 정한 “정정/수리/회복(repair) 개념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 질문”일까? 그러나 그것은 아프리카 조각품을 가져다 원시주의미술을 주창했던 서구 19세기 모더니스트 선배 세대의 순진한 욕망과 지나칠 정도로 닮았다. 백번 양보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할 포스터(Hal Foster)가 “유사 인간학적 미술”이라 칭한 1990년대 문화비판적 미술의 복제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아티아의 2012년 카셀 설치작품은 심지어 형식 및 방법상으로도 1992년 르네 그린(Renée Green)의 <수입/수출 펑크 오피스>와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적은 수의 사례밖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 카셀의 예술 실천은 내게 그 사례를 두고 볼 때 한 지역의 내전 트라우마를 예술 강자의 미적 오브제로 전유하고, 한 미술가를 인테리어 오브제처럼 다루고, 나아가 대규모 국제 미술 이벤트의 색다른 개최를 위해 개인, 사회, 문화, 역사의 상흔 및 온갖 잔여물조차 남김없이 불러들여 미술에 봉사하도록 하는 상황의 위장으로 보인다(기획자가 그러기 이전에 분명 작가들이 미술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이는 올해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거나 동원된 현대미술 기획의 기술이다. 동시에 현대 미술가들이 그/녀의 작품을 위해 자신이 아닌 타자를 마구 취하고, “전유(appropriation)”라는 이름 아래 식민화하는 방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헤게모니를 쥔 자가 헤게모니 싸움을 공박하는 자기모순을 범하면서. 좀 풀어 말하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예술을 주창하며 소위 진보적이고 아방가르드 한 미술을 실행하는 미술가와 미술제도가 바로 그 추진력과 전투성으로 사회의 여타 주체/영역/요소/사실들을 ‘미술’로 포위 공격(攻圍, siege)하는 도착적 모양새. 그렇게 해서 온갖 방대함과 저변 확대 속에서도 저 한 세기 전 아방가르드 운동으로부터도 퇴각(退却, retreat)하는 궁핍한 모양새.

 

희망(Hope)? 상연(Stage)?

카셀 도큐멘타 도록을 보면, 기획측이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2010년 7월부터 2012년 여름까지 25명 정도의 아프간 미술 전공 학생들과 진행한 세미나와 전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미나와 전시의 목적은 지역 공동체와 예술 실천을 공유하고 창작, 대면, 배움의 참여 과정을 통해 예술 실천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신이 현대미술전문가라면 최근 십여 년간 아마 비슷한 톤과 내용으로 다소 지겹다고 느낄 만큼 들은 말이다. 하지만 나나 당신이나 이런 식의 큐레이토리얼에 비판을 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런 내용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윤리적으로 내게 무조건적인 동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같은 요구에의 동참 및 실행이 지금 여기를 겨우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절실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글로벌리즘 아래 세계의 많은 지역들이 정치적 난맥상에 처해있고, 글로벌 경제의 전체주의적 실행 아래 공동체의 내재성 및 나의 사적 삶이 속속들이 쪼개져 나가면서 더 이상 ‘희망’이라는 낱말조차 떠올리기 어려워진 지금 여기서 말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사에 “공위, 희망, 퇴각, 상연이라는 네 개의 주된 포지션이 절합돼(articulated)” 있다고 주장하는 카셀 도큐멘타 13의 기획 측에 박수를 보낼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앞서 공동체, 예술 실천, 공유, 창작, 대면, 배움, 참여를 강조하는 미술 기획의 언어가 지겹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유는 그런 언어의 진리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말하는 현대미술 기획의 상투성과 그런 상투화된 모토를 따르는 작가/작품의 무능에 있다. 짧게 잡아 시간상으로는 2002년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가 총감독을 맡은 도큐멘타 11부터 현재까지, 공간상으로는 올해 카셀 도큐멘타부터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까지 우리는 예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 문화의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분배와 예술의 다원적인 대면관계에 대해, 배움-참여-협업 과정으로서의 미술에 대해서 들어왔고, 일부러 찾아가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십여 년간, 그 많은 작품과 전시에서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비슷한 모토의 선언이고, 형식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극히 미세한 변주를 커다란 성과로 눈속임하는 작품들의 향연이다. 예컨대 콩고, 알제리의 빈민가 “하위주체들의 삶”은 부산비엔날레에까지 예술 기표로 호명되고, 그에 대한 작가의 예술 실천은 대단한 발견인 양 ‘민주주의(DEMOCRACY)’와 ‘악마주의(DEMO'N'CRACY)’ 사이를 말장난하는 네온사인 설치작품으로 변제되는 식이다(미안하지만 이 사례도 2010년 부산비엔날레에 출품한 카더 아티아의 작품이다. 말이 나와 하는 말인데, 한 작가가 비엔날레 같은 글로벌 현대미술 행사들을 순회하고 겹치기 출연하는 일은 예술의 남용이 아니라 미술가와 큐레이터의 능력이 된 지 오래다). 불특정한 다수의 예술 감상자를 향해 예술 실천의 기치를 드높이면서 자신은 영향력 있는 국제 전시를 맡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큐레이터, 현대미술 감상자의 지성과 미적 감수성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얄팍한 지식과 가벼운 손재주로 급조한 작품을 가지고 감상자를 가르치려 드는 작가. 그리고 그런 큐레이터와 작가들, 거기에 심층 비판으로는 절대 파고들지 않는 담론 생산자들(비평가, 이론가, 사학자, 저널리스트 등)까지 덧붙여 그런 이들의 경력관리 장이 된 비엔날레.

비엔날레 도록의 권위 있는 글들이 언명하듯, 작가들이 사회 비판적 내용을 자기 작품의 구성 요소라고 제시하듯, 그렇게 진지하고 열심히 나서 동시대적 삶, 주변부 주체, 뒤틀린 체제를 구제하려는 현대미술이 왜 직업 큐레이터와 직업 미술가와 직업 담론가들의 경력 관리 대상이 된 것일까? 우리는 이제 동시대 삶, 주변부 주체, 현실의 뒤틀린 체제가 현대미술계의 직업 활동 무대가 된 상황을 재고해야 한다. 나아가 앞서 말한 것처럼 비엔날레들이 내거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모토를 우리가 현대미술로 실천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심정적인 윤리의 동의를 넘어 사회 현실의 다자적인 기준들을 통해서도 인정할만한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구조적이고 이론적인 정지 작업’이 필요한 단계다.

정지

구조적이고 이론적인 정지 작업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현재 자동기계처럼 작동하는 비엔날레 형 대규모 국제미술행사의 메커니즘 및 파워를 당연한 것으로, 그것을 현대미술계의 우세하고 유일한 모델로 내면화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또 기획자들의 공허한 선언문들 속에서 회자되는 동안, 동시에 작가들의 유사 이론적 작품들 안에서 전용되는 가운데 상투화 되고, 직업적 욕망으로 오염된 행위, 감정, 존재 상태 등을 미술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각종 비엔날레가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진작시킨다면서 공공연하게 공공의 기금과 미술시장의 자본을 함께 운용하는데 그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인지, 비엔날레 작가와 아트 페어 작가가 대동소이하고 두 영역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순환 행위가 당연시되는데 과연 어쩔 수 없는 일인지, 이제까지 그에 관계했던 주체들에게 물을 수 있다. 또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상대주의 분위기에 젖은 국내외 작가들 대부분이 차용과 패러디와 혼성 모방의 남용 속에 편안히 거주하면서도 감상자에게는 비판적 정신과 유보할 수 없는 참여 행위를 말/작품을 통해 훈육하지는 않았는지 재고할 수 있다. 모더니즘미술의 독창성에 대한 비판이 어느덧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식 자기 면죄부가 되지는 않았는지, 협업과 공유의 예술 실천 행위들이 미술가의 예술적 무능을 가리거나 보충하는 도구로 쓰이지는 않았는지 현대미술계 내부로부터 분석될 수 있다.

끝으로 한 가지. 내가 이번 카셀 도큐멘타를 비롯해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 그리고 독일의 젊은 작가들을 앞세워 그들의 미술을 국제 미술계에 띄우려는 의도가 뚜렷했던 <메이드 인 저머니 2>를 보며 가장 마음이 쓰였던 것은 그 전시들이 모두 엄청나게 열심히 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전혀 센티멘털한 얘기가 아니고, 오히려 가차 없는 문제제기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뭐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열심히’가 사적이고 파편적인 욕망과 그 실행에 머물면서 행위의 주체도 그를 둘러싼 세계(이를테면 미술계)도 소박하게 만들고 있다. 소박함을 산출하는 예술적 열성은 오늘 여기의 미술을 존속시키겠지만, 그 저묾을 인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위태위태해 보인다.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월간 art in culture, 2012년 11월호.





 


덧글

  • 1030AM 2012/11/10 01:11 # 답글

    추천되었는데 왜 댓글이 없... 포스트 모더니즘은 한계에 봉착하고 있음다?
  • 강수미 2012/11/10 16:14 #

    음. 이글루 시스템을 잘 몰라 추천됐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만...그렇군요.제 글에는 이상하리만치 댓글이 안 붙습니다. 하하하.
    어쨌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포스트 모던한 태도와 사고가 우리에겐 매우 자연스럽다는 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 무명병사 2012/11/11 02:23 # 답글

    포스트모던... 에구구. 일단 학교다닐 때 쓰던 공책 좀 뒤져봐야겠고요. 요즘 사고방식에서는 포스트모던이 일상화되었다고는 생각하는데, 거꾸로 보면 바로 그것 때문에 반발심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러한 파격이 이제는 식상하다는, 뭐 그런 걸까요.
    물론 저같이 비뚤어진 사람 눈에는 '지멋대로 해놓은 게 예술? 자뻑 쩌네요!'로 보이는 것도 원인이겠습니다만...


    사실 그런 거 없고 먹고사는데 아둥바둥하니 예술이 눈에 안들어오는 것 같습....
  • 강수미 2012/11/18 12:51 #

    네. 포스트모던이 끝났다는 사실은 그 이즘이 애초 표방했던 도전, 비판, 저항/반항이 일상화됐다는 데서 느낄 수 있죠. 무명병사님 말씀처럼. 예술의 "자뻑"은 그냥 있는 척 하는 태도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건 현실에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낸다는 차원에서는 항상 유의미합니다. 하하.
  • unplug 2012/11/30 20:05 # 삭제 답글

    멋진 블로그네요 미학....요즘 미학을 배우고있는데 읽을글들이많아 즐겨찾기추가했네요ㅣ;;; 앞으로종종 들리겠어요
  • 강수미 2012/12/02 18:21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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