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의 명명, 사랑과 갈등의 성-풍경 0



                                                              손정은, <명명할 수 없는 풍경>, 2011.


손정은, <명명할 수 없는 풍경>, 성곡미술관 2층 전시 전경, 2011.


손정은, <명명할 수 없는 풍경>, 성곡미술관 1층 전시 전경, 2011.


손정은, <명명할 수 없는 풍경>, 성곡미술관 3층 전시 전경, 2011.



성(性)의 명명, 사랑과 갈등의 성-풍경



손정은의 <명명할 수 없는 풍경>은 눈길을 잡아채는 에로틱 이미지가 전경을 이루고, 흥미로운 텍스트가 이미지 사이사이 삽입돼 있으며, 매우 다채롭고 다양한 질료의 사물이 공간의 양태를 풍부하게 갱신하는 전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제목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풍경을 가리키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관객이 성곡미술관 세 개 층의 넓은 공간에 전시된 다수의 사진, 조각, 설치물을 꼼꼼히 감상한다 하더라도, 작품과 전시, 나아가 그에 대한 각자의 미적 경험을 명명할 적확한 단어를 추출해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우리는 작가가 명명할 수 없다고 한 풍경이 전시 전체를 가리키는지, 작품들에 담긴 시각적 상황을 은유하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분홍색 살과 피의 분위기로 축축이 젖어있고, ‘갓 태어나 말라버린 사물’과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인간의 몸’이 백화(白化)된 빛 속에 잠겨있는 그 숲을 말더듬으며 헤맬 것이다. 그 점에서 손정은의 전시는 문자 그대로 관객 앞에 불투명하게 펼쳐진 비인간적 ‘풍경’이다. 풍경이란 우리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족적인 존재라는 바로 그 의미에서.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손정은의 전시는 ‘명명할 수 없는 풍경(unnamable-scape)’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명명행위에 열려있는 풍경(namable scenery)’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시가 ‘명명할 수 없는 것의 명명’이라는 모순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인데, 작가 자신부터 전시를 명명할 수 없다고 규정한 동시에 “심리극”이라고 제시함으로써 그 명명행위를 개시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심리극으로서 전시가 ‘제1장 무대: 사라진 비밀’, ‘제2장 현장: 부활절 소년들’, ‘제3장 코러스: 멜랑콜리아의 봄 정거장’이라는 서사적이고, 심지어 어딘가 탐정소설의 뉘앙스까지 풍기는 표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전시는 이미 명명된 무대이며, 각 표제를 키워드 삼아 관객/감상자/독자와 만나는 텍스트가 된다. 정황상 사이코드라마의 주인공과 의사, 다른 참여자가 그러는 것과 비슷하게, <명명할 수 없는 풍경>에서 작품과 작가, 감상자는 전시장 3층의 무대부터 거꾸로 거슬러 내려가, 2층 현장과 1층의 코러스에 이르는 동안 심리적으로 서로 얽히고, 갈등하면서 수많은 이름들, 의미들을 파생 ․ 분기시킨다. 그 이름과 의미는 작품에 이미 잠재된 것일 수도 있고, 관객에 의해 전혀 생경하게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같은 명명행위와 해석과정을 지배하는 요소가 전적으로 부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동시에 그래서 전시를 더욱 알 수 없는 지점으로 몰아붙이는 비의적(esoteric)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고 ‘성(性)’이다.

남과 여라는 성, 그리고 두 성의 사랑과 갈등은 인문학의 고전인 비극에서부터, ‘막장’이라는 불명예가 오히려 흥행의 성공요인인 오늘의 TV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주제다. 예컨대 아테네의 왕비 페드르는 의붓아들 이폴리트를 연모하고, 그 이폴리트는 반역자의 딸 아라시를 사랑하면서 그들 사이에는 정염과 분노, 부끄러움과 배덕, 죄의 고백과 강요된 침묵이 난무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의 벽을 넘어 사랑한 대가로 사람들의 불화를 증폭시키고 끝내 자신들의 젊은 목숨마저 희생시켜야했다. 이런 예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과 갈등은 성욕의 선정적 자극만을 목표로 제작된 포르노물에서조차 필수적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문화의 수준이나 형태와는 상관없이 광범위하고 첨예하게, 가시적이면서도 비가시적으로 삶의 모든 국면들을 유발하고, 조정하며, 결정짓는 성의 힘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 강력한 힘으로서 성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물론 생물학적으로 남과 여의 성은 타고나는 것이고, 신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문화적 형식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성은 생물학적 소여(所與)가 아니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할 때, 그 이론이 문제시하는 것이 바로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이 아닌가? 그렇지만 손정은의 <명명할 수 없는 풍경>을 그간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억압받았다고 공언한 ‘여성’이나, 생물학 또는 심리학의 ‘남성’과 ‘여성’에 결부시켜 읽어서는 안 된다. 전시는 그 지점들을 지시하거나 표상하지 않는다. 포르노그래피의 성욕과 몸뚱이 또한 모방하거나 논평하지 않는다. 일견 이 세 영역 모두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설치작품과 전시가 정작 문제시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이름이 어떤 존재에 부과되고, 그 이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갈등’하게 되는 일련의 비결정적이고 불투명한 과정 자체다. 즉 성의 힘이 삶의 큰 틀에서 세부에까지 미치고, 작용하고, 존재와 사건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순간들이야말로 손정은의 ‘명명할 수 없는 풍경’이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앞서 예를 든 라신(Jean Baptiste Racine)의 『페드르』를 분석하면서, “남녀 성이 갈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남녀 성을 규정하는 것”이라 썼다. 요컨대 비극 속의 남녀는 성차(性差)에 따라 사랑에 빠지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갈등하는 상황, 즉 “힘의 관계에서의 그들의 상황”에 따라 남성(남성다움)과 여성(여성다움)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같은 의미에서 손정은의 작품들은 미분화되고 미결정 상태의 성-풍경(sexuality-scape) 속 파편들이자 계기적 상황들이다. 그것들은 관객에 의해 때로는 남성을 향한 여성의 신경증적 사랑으로, 때로는 미소년 성애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또 때로는 에로스 일반의 폭력과 치유의 기괴함으로 열린다. “내 사랑 너는 내 안에서만 나의 시선 속에서만 살아.”라는 작가의 시에서 ‘나’와 ‘너’는 있되, ‘남’과 ‘여’, 그리고 특히 ‘외부’가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강수미 (미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월간미술 201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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