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掌篇)의 이미지 목록 0




                                                              김용관, QUBICT, 서울시립미술관 설치, 2010

                                        이창훈, Stone, 테이블 위에 자연석, 테이블 위에 종이, 2004
                                         김기훈, Sunev, 철, 스티로폼, 석고, 감속 모터, 2008


장편(掌篇)의 이미지 목록

 

지금 여기 “신진작가들”의 미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의 진행이나 사회 구조 혹은 인간 존재 같은 거대서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예술의 궁극적 지향점으로서 미술의 본질이나, 자기 삶의 정향으로서 주관성 또한 그리 큰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신진작가 발굴과 지원의 산실 역할”을 해온 서울시립미술관이 지난 10년 간 젊은 작가들의 미술 성과를 정리한 <SeMA 2010_이미지의 틈>(이하 <이미지의 틈>) 전시에 따르면, 그 작가들에게 문제는 “이미지의 문제, 즉 시각성”이란다. 이는 크게 무리가 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사실 특정 세대 군에 속하는 작가들만이 아니라 최근 한국미술의 경향, 더 정확하게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현대미술의 추세가 ‘미술’이 아니라 ‘이미지’에, ‘깊이’보다는 ‘표면’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집중’은 젊은 작가들이 모더니즘 미술까지 확립된 미학과 조형예술의 미적 신념, 또는 그 토대에 천착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내부자적 입장의 의심, 침식, 가치조정, 변주하기에 매진했다는 말이다. 또는 미술이라는 닫힌 프레임을 떠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미세하게 차이나는 이미지들을 양산해내고, 깊이의 심연에 개의치 않고 가시적 세계의 표면을 유희하면서 이미지의 목록을 늘려왔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근래 십년 간 한국현대미술계가 이들 젊은 작가들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다면, 엄청나게 긴 작가 명단과 엇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이미지 리스트다. 전시 <이미지의 틈>은 그 목록들 중 2004년 기획전 <SeMA 2004>를 시작으로 2006년부터 현재까지 ‘난지창작스튜디오’, 2008년부터 현재까지 ‘SeMA신진작가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서울시립미술관과 관계 맺은 22명 작가/작품이라는 극히 작은 부분에 기획의 초점을 맞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효과적으로 동시대 한국 젊은 작가들의 미술이 의도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내재화한 위와 같은 특성을 현상해냈다.

 

자기 꼬리를 무는 이미지 게임의 논리

<이미지의 틈> 전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감각은 과감함과 강박, 혼란스러움과 분할, 스펙터클과 잡다함, 신선함과 평범함의 모순적 공존이다. 스물 두 작가가 참여한 그룹전임에도 각 작가별로 널찍이 분할한 공간 구성은 실제 각각의 작품들이 가진 역량보다 더 그 작품 이미지의 카리스마와 개별성을 높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관객이 이 전시에서 과감함을 느끼는 것은 일정 정도 그 공간 구성 덕분인데, 사실 출품작들 대부분은 기왕에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질서, 매체 작용, 형상언어 활용의 프레임을 강박적으로 해체하며 파고든 결과 대범함보다는 소소한 재치가 빛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작품들에는 호랑이의 도약 같은 상상력과 사고력은 희박하다. 대신 현대미술에서 한때 쟁점이 됐고, 누군가에 의해서 이미 문제시된 개념과 이미지, 문화적 습관과 지각경험의 매개물을 일정 방식으로 갖고 노는 감각과 테크닉이 넘친다. 예컨대 김용관은 1966년 미국의 미니멀리스트들이 ‘기본 구조(primary structures)’라는 이름으로 유대인 미술관(Jewish Museum)에서 행한 전시 광경을 환기시키는 하얀 구조물 공간을 조성하고, 전체 표면에 검은 사선을 그려 넣음으로써 2차원과 3차원을 구분하는 우리의 공간지각을 단순명료하게 위협한다. 정상현의 작품은 사진과 영상매체를 통해 일상의 물리적 공간과 이미지화된 공간의 병합 또는 교란을 이끈다는 점에서 평면과 입체, 물질성과 환영의 경계를 문제시한 김용관과 개념적으로 같은 지층에 있다. 다만 한쪽이 시각적 모티브와 매체의 표현력을 최소화하면서 ‘시선의 지각과 착각 문제’를 건드린다면, 다른 한쪽은 현실생활에 과도하게 흘러넘치는 합성이미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사진과 영상을 몽타주하면서 ‘시각의 욕망과 그 마취 상태’를 비추는 점이 다를 뿐이다. 또 이창훈은 두 개의 테이블에 완전히 동일하게 배치된 조약돌 무리(그러나 한쪽은 자연의 돌, 다른 쪽은 작가가 만든 돌)를 제시하고 관객의 눈을 시험에 들게 하며, 김기훈은 모터로 돌아가는 두 개의 스티로폼 기둥 조각을 내놓고 감상자에게는 오히려 그 두 기둥의 간극이 만들어내는 비너스 형상의 ‘허공’을 응시하라고 요구한다. 요컨대 이들은 진짜와 가짜, 본 것과 아는 것, 망막을 통한 보기와 미디어의 중계를 통한 보기, 순수한 시각과 학습된 시각의 양자 관계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를 제시하고, 정작 자신의 미술은 그 양자의 ‘틈’에 있다고 주장하는 형국이다.

현재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즐겨 취하는 이 같은 유형의 미술은 얼핏 그 주제의 재기발랄함과 모티브의 시각적 재미로 감상자에게 꽤 잘 어필한다. 하지만 실상 그 미술은 전문적인 의사소통구조 내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 매우 협소한 문제제기 선(線)을 따라 움직이는 미술이다. 모더니즘 회화가 ‘평면성’이라는 자기 지시적이고 자기 환원적인 문제에 매달렸던 것처럼. 덕분에 <이미지의 틈>전은 말 그대로 오늘 여기의 젊은 작가들이 ‘시각이미지의 틈’이라는 저 가파르게 깎아지른 미술의 지적 주제(“시각성”)를 무대 삼아 생존 경쟁을 벌이는 최근 10년의 상황을 성공적으로 요약하고 소개하는 전시가 됐다. 하지만 그것은 담론과 이미지를 창조하는 매체를 생산하기 보다는, 이미 실행된 세계의 꼬리를 물어 게임을 지속시키려는 의지의 미술 실천으로 보인다. 이 경우 미디어가 다양화, 다중화 된 만큼이나 우리의 상상력 및 감각적 지각 또한 다변화하고 있는데, 굳이 미술은 ‘시각’에 한정해서 그것을 새삼 문제시한다는(작품부터 전시까지)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물론 <이미지의 틈>전 출품작 중에는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들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이학승의 <보이스킷 그룹>을 꼽을 수 있는데, 작품은 작가의 짧은 자작시를 각각 청각장애인, 일반인, 성악가 그룹이 소리 혹은 의성어 혹은 음악으로 번안해 부르는 퍼포먼스영상과 그 퍼포먼스를 위한 일종의 준비 자료 성격의 드로잉(악보)으로 구성돼 있다. 세 개의 비디오 속에서 개별 그룹의 젊은 남녀는 온전히 자신의 신체, 말하자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몸이자 삶의 경험을 통해서 재조직화한 자아와 육체로 노래한다. 카메라 앞에서 그 자아와 육체는 볼거리가 되지만, 각 그룹의 개인들이 내는 사운드는 그것이 기묘한 웅얼거림이든 무의미에 가까운 의성어든(예컨대 잡지 뒤적이는 소리), 아니면 미화된 육성이든 주체적으로 존재하고 발화한다. 이 경우 미술은 상당히 근사한 역할을 맡는다. 즉 비물질적 요소를 감각으로 형상화하고, 예술로만 가능한 어떤 정치적으로 정당한 태도를 입안하면서, 감상자가 상상력을 통각적으로 사용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헤드폰을 쓰고 영상에 집중하기를 꺼려하는 일반 대중, 특히 아이들이 유독 이학승의 모니터 앞에 줄을 선 이유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미지의 틈>전에서 감상자가 신선함과 진부함, 혹은 흥미로움과 평이함을 동시에 느낀다면, 이유는 작가들이 제각각의 매체를 채택해서 그 매체의 형식 및 속성을 자기 작품의 내용 또는 개념과 매끈하게 접합했기 때문이다. 그 매끈함이 독/약이다. 가령 이중근은 거의 십 년 가까이 이미지(인물, 신체, 사물, 풍경 사진)의 파편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패턴화한 그림을 내놓고 있는데, 사진의 복제성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자동성이 그의 작품에서처럼 명료하게 표상되고 주제화되기도 힘들다. 현기증 나는 패턴의 반복 속에서 사실의 조각난 이미지는 추상이 되고, 기계매체의 속성은 예술로 승화되는 것인데, 문제는 그 패턴의 제작 테크놀로지만큼이나 작품의 내용이 반복의 자동성에 빠졌다는 점이다. 굳이 이 작가를 예로 들었지만, <이미지의 틈>전에는 그럴 위험성이 보이는 작품들이 여럿 있다. 특히 아이디어가 돋보이고, 그 아이디어를 효율적이고 명시적으로 조형한 몇 몇 조각과 영상이 그렇다. 사실 우리 감상자는 금방 자신의 머리에 이해되고, 금세 자기 눈을 즐겁게 하는 대상에 빠진다. 그 순간 신선하다고, 흥미롭다고 열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 번, 세 번 반복되거나 이곳저곳 도처에서 보이면 곧 진부하다고, 평범하다고 평가 절하한다. 그것이 미적 수용 태도로 정당한지, 생산적인지 여부는 여기서 논할 수 없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현재 젊은 작가들이 한 순간의 효능 밖에 없는 미술에 소모적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소모성이 미술 창작과 수용 양 측에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말한 “무궁한 목록(perpetual inventory)”이 아닌, 손바닥 장(掌) 자를 쓴 ‘장편의 목록’을 만들고 있다.

 

강수미 (미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월간미술 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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