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 없어지는 신체, 그림이 된 현실 by 강수미


신미경, <Translation> Kukje Gallery installation view, 2009    사진제공: 국제갤러리 

신미경, <Translation> Kukje Gallery installation view, 2009    사진제공: 국제갤러리



유현미, <Bleeding Blue> Mongin Art Center installation view, 2009, 사진제공: 유현미
유현미, <그림이 된 남자> video, in <Bleeding Blue> Mongin Art Center installation view, 2009, 사진제공: 유현미
 


닳아 없어지는 신체, 그림이 된 현실

 

필멸(必滅, mortality)에 대한 자각은 불멸(不滅, immortality)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추에 대한 반감은 미를 향한 맹목적 헌신을 축복으로까지 여기며, 세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조건은 무한히 초월의 영역을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이 모순의 서사가 아마도 기원전 몇 만 년경 저 먼 고대부터 인간이, 지금 우리가 ‘예술’이라 총칭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낸 근본적 맥락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현재의 미술작품, 전시를 다시 둘러보자. 이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이미지의 기원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미술계(art world)’ 자체의 맥락 안에서 출현하고 흩어지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운명, 그 번쩍거리지만 헛헛한 것들의 반복 순환이다.  

현대미술작품의 운명에 대한 비누-몽타주

내게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신미경의 <Translation>전은 현대미술의 내적인 역학과 자기 지시적 맥락 속에서 태어나고, 온갖 비평 수사/미학 언어와 전시 장치 속에서 화려한 삶을 살다가, 급속히 사라져가는 ‘현대미술작품의 운명에 대한 몽타주’로 보인다. 혹은 그러한 운명을 시각적으로 번안한 번역물로 읽힌다. 더 이상 불멸의 이미지를 꿈꾸지 않고 특정 유행과 경향 속에서 명멸하는 미술, 아름다운 형상의 포화 상태에서 일부러 엇나가듯 기괴하고 어그러진 감각을 선호하는 미술, 신적/절대적인 것과 그것의 창조에 대한 예술의 믿음이 완전히 해체된 상태에서 재료의 물질적 차원, 개념의 현시적 효과, 기교의 세련된 수준이 평가 기준이 되는 미술. 우선 신미경이 전시에 선보인, 고대 그리스풍(Archaic) 조각상이나 아시아의 전통 도자기를 모방해 만든 작품들이 이와 같은 동시대 미술의 성향을 압축하고 있다. 즉 그 자체가 덧없는 질료(비누) 덩어리로서, 그로테스크하게 깎이고 닳은 형태로서, 원본의 복제로서, 또한 ‘역사/지역/문화의 간극에 대한 번역’이라는 창작 의도의 구현물로서, 그 작품들은 현대미술의 중요 특징들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조해야 할 것은, ‘예술’이라는 개념과 제도가 아예 없었던 시대의 산물을 차용한 신미경의 비누 조각들이 현대미술작품의 생리에 대한 지표라는 사실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흉상과 전신상은 애초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감상과 유희’의 대상이 아니라 ‘제의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서구 18세기 미학 ․ 미술사 ․ 박물관과 같은 제도의 태동과 더불어 그 오래된 과거의 것들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영원한 미와 숭고한 관념을 현현하는 ‘미적 사물’이 되었다. 이후 수많은 작가와 이론가가 그 사물 아닌 사물을 모방하고 추종하면서, 영원성, 아름다움, 숭고, 고귀한 미의식, 무관심성 같은 개념을 미학적 가치로 정립시켜, 자신의 시대에 그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미경의 작품들은 우리 시대가 그러한 미술이 가능하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은 예술의 시간대임을 보여준다. 지금 미술의 시간 속에서는 신미경의 여러 개 비누-아프로디테들에서 지각할 수 있듯이, 유일무이한 미의 형상은 원하기만 한다면 다수, 반복, 복제 생산될 수 있는 어떤 것의 부재증명(alibi)이다. 또 전시장 중앙 홀에 일렬로 늘어서있는 8개의 입상(Kore와 Kuros를 모방한), 4 대 4로 나뉘어 서로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 비누 조각상들이 보여주듯이, 원래 그것이 속했던 삶의 질서에서 발췌돼 상이하고 낯선 파편들로 인용, 참조, 번역, 재해석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신미경이 “<트랜스레이션> 연작을 통해 (...) 치밀한 완성도를 가진 원본의 재현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각 작품이 역사성과 유일무이성을 지닌 작품으로 재해석되는 데” 제작 의도를 둔 것은 핵심을 비껴가거나 모순이다. 비단 신미경의 작품/전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작가가 모방한 조각상이나 도자기류를 역사의 유물이자 유일무이한 원(原)작품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코가 뭉그러지고, 울긋불긋한 색채가 덧입혀졌으며, 다수 복제된 비누-비너스, 코레, 쿠로스야말로 원작의 역사성과 유일무이성에 가해지는 현대미술의 의심이자 위반이라 말하는 것이 더 핵심을 짚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의심과 위반의 창작행위, 개념적 제스처를 통해, 모순되게도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연작은 원본의 도용(appropriation), 흉내 내기(mimesis)가 아니라 현대미술계 속에서 동시대성과 독창성을 확보한 유일무이한 예술작품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더 맞아 보인다.

사실 신미경의 작품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유물들의 역사적이고 존재론적인 가치를 재조명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애초 사회적 존재방식과 기능을 오늘 우리의 사회적 ․ 예술적 조건 속에서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구현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작가는 8개의 입상 중 4개를 이번 전시에 앞서 경기도미술관 야외공간에 100일 동안 설치해 비누로 만든 그 여린 것들이 바람과 비, 시간의 마모를 겪도록 했다. 이는 고대 대리석 유물들이 자연의 강압과 유구한 인간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온 과정과 유비되지 않는가? 또 작가는 자신의 비누 조각 하나를 갤러리 화장실에 비치해 관람객들이 실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그리스 사회에서 신성의 조각상들이 수행했던 기념비적이고 제의적인 기능이, 현대미술의 메커니즘 안에서 범속한 기능으로 변용된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누빔점의 사진, 기술복제이미지가 된 현실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등 장르의 구분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의 창작과 수용을 ‘미술계’라는 독자적인 장(場) 속에서 이뤄지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하지만 현재 작가들은 장르의 복합화와 매체 간 융합을 실험함으로써 보다 확장되고 유연한 미술, 우리의 복잡다단한 삶의 면모와 그리 간극이 벌어지지 않는 미술을 지향한다. 이것이 몽인아트센터 개인전에 선보인 유현미의 <Bleeding Blue>연작 사진과 단편영화에 접근하는 하나의 키워드이다. 작가는 결과물로만 따지면 각각 ‘사진’과 ‘영상’ 장르로 분류될 작품들을 전시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과정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 내용은 ‘회화’가 주를 이룬다.

그것은 이번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시도한 작가의 (극영화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영상작품 <그림이 된 남자>를 살펴보면 충분히 드러나는 점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집에 이웃집 남자와 그 동료 몇이 갑자기 들이닥쳐 거실내부와 그곳의 큰 가구에서부터 자잘한 물건들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 청년까지 온통 그림으로 덧그려버리는 가상의 사건을 연출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외형적으로 드라마 형식을 취한 이 영화가 작가 유현미의 최근 사진작품들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다큐멘터리’화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설명하자면, 실제 3차원 공간과 사물, 또 살아 숨 쉬는 인물에 흰색 바탕칠을 하고, 그 위에 마치 2차원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붓질로 색채와 명암을 묘사해 넣는 과정이다. 전시의 여타 사진작품들, 현실을 초과하는(sur-real) 푸른색 분위기를 풍기는 그 사진들이 모두 이 영화 속에서 사건으로 실행된 바로 그 과정과 비슷한 식으로 제작됐다. 예컨대 창문 앞에 책들이 절묘하게 아치를 그리며 쌓여있는 사진, 사다리에 탁자-거북이-바위-의자가 중력을 거스르듯이 꽂혀있는 사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요컨대 작가는 입체와 평면, 실재와 재현, 회화와 영상, 그 어딘가를 떠도는 이미지를 작품이라는 ‘누빔점(quilting point)’에 집결시킨다. 혹은 다자적으로 봉합한다.

그런데 눈앞에 한 장의 완결된 매끄러운 사진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유현미의 작품에서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작업이 현실의 표면을 이미지로 재(再)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흡사 그녀의 단편영화 속 이웃집 패거리들이 폭력적으로 주인공과 집 전체를 이미지화하듯이, 작가의 창작 과정 퍼포먼스 자체가 문자 그대로 우리의 객관 현실을 이차원 환영으로 도포해버린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유현미의 작품에서 시공간 속 실체를 가진 현실과 인간은 그림(드라마)의 무대이고, 그 그림은 다시 기술복제이미지(사진, 영상)의 밑그림이 된다. ‘예술작품’을 위해 행해지는 이 실재의 순환, 이 장르의 복합화야말로 우리가 이미지의 원사(原史)에서 엄청나게 멀리 왔음을 예증하는 한국현대미술의 또 하나 지표이다.

 

강수미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미학)
월간 art in culture 201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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