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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열 선생님의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서평 andere Motive


최열 선생님께서 달진닷컴(김달진미술연구소)에 서평을 쓰셨군요.(7월 말에 쓰셨다는데, 제가 과문해서 늦게야 아는 척을 합니다.)

제 책에 대한 서평을 떠나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문단에 주목할 경우, 우리는 아주 짧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현대미술비평사의 핵심적 성격 하나가 분석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문단의
"29명이 모두 돈, 명성, 권위, 영향력 따위 ‘물질에 얽매인 현 사회 공동체의 의식과 감각을 깨우고 현재 삶의 체제 너머를 구체적으로 꿈꾸게 하는 미술’을 행위하는 작가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개인의 미적 자유가 곧 공동체적 삶의 자유로 승화될 수 있는 사회체제를 추동하는 예술가’인지 알 수 없지만"
에서 얼굴이 확 붉어집니다. 저도 그런 의미에서 29명 작가를 논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런 모양새가 됐으니, 찔린 것이죠. 하하하.



http://www.daljin.com/02.730.6214.html

한국 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강수미 지음 | 현실문화연구 | 368쪽 | 18,000 원 | 2009년 6월


지난 해 두 번째 비평집으로 제3회 석남젊은미술이론가상을 수상한 강수미가 세 번째 비평집을 내놓았다. 동세대 비평가들 몇몇의 진출이 눈부신 가운데 강수미란 이름이 유난했던 것은 처음부터 전시기획에 기량을 보여주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1970년대부터였을게다. 비평이 몰락의 조짐을 보였던 때는. 새로 출현하는 서구 미술양식을 이식하여 내용 소거와 형식 모방을 반복하는 주류 곁에서 그 형식주의와 순수주의를 옹호하기에 분주했던 비평은 이미 비평으로서의 정체성과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다. 1980년대에 내용주의와 정치주의를 제창하는 비평이 등장하고 내용 대 형식, 순수와 정치의 대립구도가 형성된 탓에 긴장감으로 그 수명을 연장했지만 1990년대 이르러 또 다시 서구 포스트모던의 겉모습만을 바쁘게 이식하느라 넋을 앗기고 말았으니 몰락의 늪은 필연이었다.

해설만 나열한 채 아무런 전망도 꿈꾸지 못하는 글쓰기는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해설비평이 만연한지 너무도 오래되어 기억조차 할 수 없지만 근래 시장의 강세는 비평의 몰락을 더욱 부추켰고 이제는 누구건 글쓰면 그게 비평이다. 비평 주체의 대중화,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문제의식으로 충만하여 주류건 비주류건 그 시대와 대결하는 글쓰기를 비평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도 미술과 비평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며 이상세계의 전망을 구축하는 행위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강수미는 ‘미술이 현실사회 속에서 공공적으로 기능하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다. 강수미는 미술비평은 ‘사회적 현존의 재건’이라는 부르디외의 말을 인용하여 그 재건을 위한 ‘쌍방통행로’라고 생각하는 비평가다. 그저 미술이라는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설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비판과 논쟁의 힘을 믿는 게다. 강수미가 젊은미술이론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믿음이 아니었을까.

이 비평집은 유혹, 관찰, 경계, 확장, 정치라는 다섯 주제로 나누어 배치한 29명의 작가에 대한 산문이다. 29명이 모두 돈, 명성, 권위, 영향력 따위 ‘물질에 얽매인 현 사회 공동체의 의식과 감각을 깨우고 현재 삶의 체제 너머를 구체적으로 꿈꾸게 하는 미술’을 행위하는 작가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개인의 미적 자유가 곧 공동체적 삶의 자유로 승화될 수 있는 사회체제를 추동하는 예술가’인지 알 수 없지만 강수미의 글쓰기에는 그 감각, 그 희망, 그 이상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다. 펼쳐드는 순간 말이다.

최열,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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