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집과 그림: 이고운의 ‘서걱이며 걷는 밤’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집과 그림: 이고운의 ‘서걱이며 걷는 밤’


쿨투라 2022년 11월호.

([당분간] 전문은 잡지와 해당 사이트에서 읽으세요.)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이고운: 서걱이며 걷는 밤하우스갤러리 2303 전시 전경, 2022. 사진: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그 조각: 정서영이 ‘오늘 본 것’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그 조각: 정서영이 ‘오늘 본 것’


쿨투라 Cultura 2022년 10월호.




                  《정서영: 오늘 본 것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2022. 사진: 강수미




CULTURA 2022. October. 갤러리-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그 조각: 정서영이 오늘 본 것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물건의 감각

그저 사물, 우리가 쉽게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들이 어떤 감각을 느낄까? 살아 숨 쉬는 존재, 가령 사람부터 동식물까지 감각기관을 지닌 생명들처럼 지각 경험을 할까? 그러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나무로 만든 책상이, 골조에 덧대진 스펀지가, 진녹색 플라스틱 이파리가 나사못이 박히면 아프다거나, 살랑대는 바람에 간지럼을 탄다거나, 갑자기 켜진 조명에 하며 당황한다고 상상하면 얼마나 기이한가. 이를 두고 누군가는 지극히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편향된 지각 경험이라고 타박할 것이다. 또 상상력 박약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미학을 언급하며, 아직 세상에 편견 없는 아이들은 사물과의 유희적 관계 맺기로 얼마든지 그것들의 생기(生氣)를 알아챈다면서. 하지만 물건의 유기체적 기관이나 지각 구조를 증명할 수 없는 한 우리가 그 물질적 존재’(‘에 대한이 아니라) 느낌을 상상하는 자체가 이미 사물을 의인화하는 인간 문법의 그물에 걸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주목할 미술가 정서영은 뭔가 다르다. 그녀는 자기 작업 이력에서 조각 공부는 어떻게 사물이, 물건이 예민해지는지 열심히 생각할 수 있게한 원천이 됐다고 했다. 그것도 2007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가진 개인전 관련 인터뷰 중 자신의 1990년대 초중반 독일 유학시절을 돌아보며 한 진술이다. 이에 근거해 볼 때, 정서영은 창작 초기부터 사물이, 물건이인간의 대상이 아니라 독립적 존재라는 관점 혹은 아이디어로 작업해온 것 같다. 그리고 20229월 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정서영 개인전 오늘 본 것 What I saw today에 이르기까지 사물, 물건의 주체적 감각을 살피고, 생각하고, 조각으로 출현시키는 여정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인 증명의 제시가 아니라, 가시적이고 촉지적인 예술로의 구체화(materialization) 여정 말이다.

 

조각의 실체

미술의 세부 장르 중에서 조각은 통념상 크고 무거운 입체 형상으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른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고대 그리스의 니케 상, 청동으로 주물 뜬 로마의 기마상, 7톤 무게를 버티고 선 로댕의 지옥문, 권진규의 황토 빛 테라코타 인물상, 거울보다 완벽한 반영을 이루는 아니쉬 카프어의 스테인리스스틸 구체(球體) 등 시대부터 재료와 모티프까지 제각각이라도 조각하면 대체로 일치하는 상식적 조형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외 현대미술(Contemporary Art Scene)에서 조각은 그러한 조형성과는 상통하지 않는 이질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물론 한쪽에서는 꾸준히 마초적인 공공조각이 세워지고 형상을 빚든(소조) 깎아 만들든(조각) 스테레오타입의 조형물이 유통돼 왔다. 그런데 현대미술계에서 일컫는 조각이란 이제 예민하고 약한 형식, 초라한 재료와 현실적 매너, 비물질에 가깝거나 유동적인 상태, 물질과 공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와 시간을 매개하는 사건 쪽으로 스펙트럼을 넓혔다. 또는 장르 자체가 해체되고 다원화하며 조각의 실체를 바꿨다.

정서영은 한국 현대 조각의 축 또한 그렇게 옮아가고 장르가 변하는 데 선명한 역할을 했다. 그 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다행히도 그 면면을 오늘의 우리는 오늘 본 것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전시를 마치 실물을 가지고 실제 공간에서 도록을 펼친 것처럼 구성했기에 가능한 감상이다. 칸막이를 세우지 않아 뻥 뚫린 비스타(vista)가 확보되는 서울시립미술관 1층 전시실에 약 30년에 걸친 정서영의 작품 총 33점이 1993년 초기작부터 2022년 신작까지정연하게 제시된 것이다. 전시 공학적으로 설명하면, 흰 띠로 경계선을 표시한 거대한 직사각형 안에 다양한 성향과 맥락의 정서영 조각들이 각자의 고유 영역을 점유하며 디스플레이 되었다.

 

그 조각

전시는 관객이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전망대>(1999)<파도>(1998)로 시작해, <조각적 신부>(1997), <가운데 서고 가운데 눕고 가운데를 열어서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2022) 등 앞서 언급한 흰 띠 내부의 작품 군으로 정점을 이루고, 전시장 끝에 만든 작은 방에 배치한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2007)를 돌아 나와, <말 그대로>(2022)로 종결된다. 나는 여기서 일부러 작품 제목과 제작연도를 명시하며 전시 전체를 스케치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다. 정서영의 조각이 현재까지 수 십 년 동안 탐구하고 실현시킨 예술의 실체가 얼마나, 어떻게 상식적 조형성과 간극이 있는지 독자들이 짐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전망대>는 현실의 전망대 건물처럼 보이지만 그 위에 올라 전망을 즐기기에는 애매한 규모의 건축적 조각이다. <파도>는 찰나에 철썩이는 비정형의 파도가 아니라 그 액체상태의 한 귀퉁이만 유토로 빚어서 제스모나이트로 단단히 캐스팅한 조각이다. <조각적 신부>는 드레스의 치마 뒷부분이 사라져 크리놀린을 들킨 모습처럼 세 축의 나무다리에 미색 스펀지가 봉제된 형국의 조각이다. 그 나무다리들에는 하얀색 도자기 같은 것이 물받이인 양, 신발인 양 끼어 있다. 이번 전시의 신작인 <가운데 서고...>는 동물의 가죽 대신 비건 가죽을 깔고 그 한가운데서 작가가 몸을 움직여 흑연으로 그린 드로잉 조각이다. 제목에서처럼 거의 누운 자세로. <아이스크림 냉장고...>는 업장의 그것을 형태상 모방하되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대신 내부를 전기 빛으로 채운 조각이다. 그리고 신작 <말 그대로>는 전시실 바닥에 목재용 접착제를 섞은 소금 녹인 물을 사방으로 흘려서 자연 건조시킨 자국이다. ‘말 그대로시간이 그린/말라붙은 결정(結晶) 조각이라고나 할까. 이상 나의 언어로 묘사한 정서영의 전시작들은 그 각각으로, 제작 당시마다, 기성의 조각과는 다른 미학적 질과 형식을 창안해낸 성과다. 그래서 단일한 장르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집합적이고 열린 개념으로서 조각()’이라고 표기하게 된다. 정서영은 이를테면, ‘조각이라는 둔탁한 덩어리를 칼로 내려치듯 모서리를 치고 정교히 세공하듯 여러 각도의 다채로운 입면들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크고 무거운 조형물로서 조각 영역에서 비례의 상대성을, 액체의 사물화를, 물질을 통한 수사학을, 퍼포먼스의 물리적 잔존을, 일상 물건의 심미화를, 시간에 의한 공간 등등으로 분절 다양화 해낸 것이다.


조각가

다른 한편, 앞서 인용한 정서영의 말, 어떻게 사물이, 물건이 예민해지는지열심히 생각했다는 말을 조각가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어떨까. 그 경우 우리는 물건에 귀나 피부가 있다는 생각보다는 더 일반적으로 공감할만한 뜻을 얻을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좋은 조각을 하기 위해서 물질을 어떻게 조형해야 할까, 각 사물의 물질적 속성을 어떻게 예민하게/정교하게 구체화 할까를 고민한다는 의미다. 이 경우 주체는 사물이, 물건이 아니라 조각가.

정서영은 모더니즘 미술사까지 정립된 조각 장르의 컨벤션으로부터 더 자유롭고 유연하며 다원적인 미술을 추구해왔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들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조각가라고 정의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희망한다. 혹자는 이 작가를 느슨한 의미에서 설치미술가로 부른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 작가 스스로 공연 연출을 도입해 개인전을 하고(<Mr. KimMr. Lee의 모험, LIG 아트홀, 2010), 비디오와 사운드 작업(<세계>, 2019)도 지속해 왔기에 조각가라는 명명이 조금 빡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서영이 조각가의 정체성으로부터 달아나거나, 반대로 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적은 없다고 봐야할 것 같다. 데생을 하고, 질료를 써서 형태를 만들고, 그렇게 해서 3차원 공간을 점유하며 감각의 대상이 되는 인공의 미적 존재를 창출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원적으로 확장된 현대 조각의 여러 요소들을 괄호 치고도 끈질지게 현존하는 공간물질이다. 요컨대 정서영이 조각가인 것은 조각을 시간, 일시성, 비물질, 소리, 영상, 사건, 일상, 언어 등으로 다양화하면서도 결코 공간의 존재와 사물의 본질을 삭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그 두 가지를 조각(“조각 공부”)의 토대로 삼아 오늘 본 것에 이르렀을 일이다.

 

언어, 본 것

앞서 열거한 작품명들에서 이미 느꼈겠지만, 정서영은 독특한 작품 제목과 전시 타이틀을 짓는 것으로 꽤 유명하다. 그 독특함은 현대문학의 실험적 문장 같은 추상성과 활자를 읽는 것만으로 어떤 이미지들이 연상되거나 감촉되는 구체성이 배합되었기에 발생한다. 정서영에 따르면 그녀는 언어가 되었을 때 작품과 같은 성질이면서 작품을 가둬 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제목을 지으려고 애써왔다. 유독 가둬 놓지 않을 수 있는이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데, 이로써 정서영 조각과 언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 제목이 오늘 만난 것이라거나 오늘 만진 것/맡은 것/들은 것/맛본 것이 아니라 하필 오늘 본 것인 의도가 뭘까? 우리가 접촉하거나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 대상, 또는 섭취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타자적 존재에 대해 할 수 있는 행위란 그저 보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넘지 않으면서, 침해하지 않으면서, 잡아먹지 않으면서, 파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말 파악(把握)하다는 한자어로 손에 쥠이라는 뜻이 있고, 재미있게도 같은 뜻의 독일어 번역어 ‘ergreifen’과 영어 번역어 ‘seize’‘grip’ 또한 움켜쥠’, ‘장악함’, ‘지배등의 함의를 갖는다. 그런데 조각가가 숙명처럼 하게 되는 행동은 재료를 손에 움켜 쥐고서 예술적 기교로 깎고 연마하고 세공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조각가는 질료의 성질을 파악해야 하고 창작과정 전반과 모든 세부를 컨트롤해야 한다. 그런데 정서영은 오늘 본 것을 말한다. 이로부터 나는 다시 한 번 정서영이 사물을 가둬놓지 않고, 조각 장르나 언어의 그물, 나아가 감상자의 교육된 시선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발견하려 하는 조각가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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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카메라 나투라: 강홍구의 신안 바다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카메라 나투라: 강홍구의 신안 바다


쿨투라 2022년 9월호.







CULTURA 2022. September. 갤러리-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카메라 나투라: 강홍구의 신안 바다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강홍구의 개인전 신안 바다-, 모래, 바람을 보러 북촌의 원앤제이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작품이 있다. 당구대에 그린 <신안 전도>. 속칭 당구다이두 쪽을 맞댄 표면에 전라남도 신안군 일대를 그린 것이다. 갤러리 초입에 걸린 위치만큼이나 내용 면에서도 전시 도입부 역할을 한다. 당구대라는 것이 사실, 제 주위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한번쯤은 모서리에 걸터앉아 폼 잡게 하는 매력이 있지 않은가. 그것처럼 <신안 전도>는 관객을 유인하고 이내 전시장 안쪽에서 본론으로 보게 될 신안 바다에 대해 한편으론 제각각 아는 체를 하며, 다른 한편으론 작가가 포착한 자연을 상상하며 한참을 서 있게 한다. 강홍구 작가는 큐대를 쥔 손들이 들고나고 빨강 노랑 흰색 공들이 굴러다녔을 당구대의 짙은 푸른색 깔개천이 마치 진짜 바다색이기라도 한 양 그 혼방직물 위에 신안의 섬들을 물감으로 그려놓았다. 흑산도나 홍도, 비금도처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유서 깊은 섬부터 만재도나 가거도처럼 최근 몇 년 방송을 통해 친근해진 섬까지 말이다. 72곳 유인도부터 953곳 무인도까지, 합쳐서 1000곳이 넘는 다도해, 그 신안군도(群島)의 일부를 어선, 참돔, 새우, 문어, 돌고래 등과 함께 일러스트 한 것이다.

그 점에서 <신안 전도>는 사실(fact)이 아니다. 제목은 전도(全圖)’지만 부분만 그렸고, 지리학이나 해양생태학의 데이터와는 거리가 먼 그림형상이기 때문이다. 애초 자연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아니다. <신안 전도>는 작가가 태어나고 자라서 선생 직까지 했던 변방, 만학으로 홍대 미대 회화과에 진학하며 떠난 고향, 지난 17년 간 꾸준히 다시 찾아 사진 찍으면서 자신 안에 잔존한 과거와 현재 간의 을 절감한 지역으로서 신안을 주관적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익숙한 낯설음 혹은 기시감을 지난 미시감”(작가노트)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2005년부터 지속적으로 작업한 결과 방대한 양이 쌓인 신안 사진들에서 고르고 고른 천여 장과 그와 병행한 회화, 드로잉 작품을 다시 선별해 1부와 2부로 나눠 선보인다. 올해 신안 바다-, 모래, 바람1부인 셈이다. 짧은 문장 속에 우겨넣었지만, 이로부터 강홍구 작가의 개인사적 배경과 작업 이력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그가 지속해온 창작의 주 매체가 사진이라는 점과 예술 형식으로서 회화가 사진과 공조하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강홍구의 작업은 사적인 차원의 경험적 구체성과 객관적 차원에서 주어진 대상의 사물성이 함께 작용하는 속성을 띤다. 그러기에 <신안 전도>는 전시의 대표작은 아닐지라도 상징적이고 흥미롭다.

 

사진-회화; 타블로

강홍구는 30년 전, 한국사회의 속물적 풍경이나 할리우드 영화 스틸에 자신의 얼굴을 조합한 디지털 이미지 합성 나는 누구인가?연작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작품의 이미지는 의도적으로 조악했고 작품에 담긴 메시지는 냉소와 비판을 버무린 것이었다. 그리고 2022년 현재 신안 바다는 제목이 명시하듯 수많은 섬들을 품고 있는 서해안 자연이 주제다. 1부 전시를 설명한 작가의 말로는 신안의 풍경이 중심이며, 해양생물들의 삶과 죽음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덕분에 전시작들은 신안 일대를 스펙터클하게, 장엄하게, 정겹게, 신비하게, 희한하게, 두렵게, 동화같이 등등으로 보여준다. 또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풍량과 습도와 온도에 따라, 나아가 대상(사방으로 펼쳐진 뻘밭, 섬을 향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배와 건설 중인 다리...)에 매혹당한 작가의 시선에 따라 유일무이해진 그때 그곳의 존재(있음)를 미학적으로 제시한다. 가령 기점도, 화도, 어의도의 갯벌 사진 위에 작가 자신이 유년기에 그리 놀았던 기억을 되살려 벌거벗은 아이와 바다 생물들을 덧그린 <뻘밭> 삼부작(2022)은 자연스럽지만 허구적이다. 또 해양화 형식을 따라 가로로 길게 편집, 인화한 <만재도 1>(2018)은 미역으로 빽빽이 덮인 만재도의 바위들을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중세 풍경처럼 신화적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한다. 요컨대 신안 바다-, 모래, 바람전시작들 각각은 카메라에 담긴 그곳의 객체적 자연과 강홍구 작가만의 후반작업 표현법(디지털 합성, 사진 위에 회화)에 힘입어 사진-회화 타블로로서의 미학을 맘껏 패러프레이즈 한다. 하지만 작가, 작업의 정체를 어느 쪽으로 나눌까?

핵심만 말하자면, 강홍구는 지금까지 수십 년의 긴 작가 경력 동안 사진을 주 매체이자 표현 기제로 쓰되 사진예술보다는 더 복합적인 의미에서 현대미술을 하고 있는 작가다. 전자가 피사체, 사진 내재적 조건들, 사진의 역사, 장치와 기법, 렌즈를 통한 이미지에 토대를 두는 예술이라면, 후자에서는 매체 내적 규범 대신 작가가 주제의 구현이나 지향하는 미학에 따라 사진 영상의 언어를 취한다. 강홍구가 비단 회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의 사진이 현대미술작품들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자/표현하고자 해온 시각적 내용이 사진, 회화, 드로잉, 이미지 콜라주 등 여러 형식을 매개로 변주돼 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강홍구에게 사진은 변주의 기본 툴 중 하나이고 유연한 장치로서 제몫을 해왔다는 점이 근거다. 여태 그의 작품들은 디지털 사진 합성, 사진 위에 채색하거나 형상을 겹쳐 그리기, 회화적 구성으로 사진이미지 변질시키기 등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를테면 그것이 강홍구만의 현대미술로서 사진이미지를 위한 포스트프로덕션 법이다. 단지 기교나 표현방식이 아니라 주제를 시각이미지로 변신시키는 스위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잠깐, 서두에 소개한 <신안 전도>는 온전히 그림이다. 드론촬영, 항공사진, 인공위성이미지 등 맘만 먹으며 쉽게 찍거나 구할 신안 해도(海圖)를 바탕에 까는 대신 당구대 천에, 강홍구는 자신의 손과 마음(기억, 상상력, 정서)을 포개 그 지도 아닌 지도를 그렸다. 이 작품 외에 개인전에 나온 모든 작품이 작가가 찍은 신안 사진을 바탕으로 한 것과는 달리 말이다. 자연 다큐 사진의 객관적 기록을 비껴나고, 또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인장 같았던 현대미술로서 사진이미지의 구성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말이다.

이제 문제는 타블로다. 프랑스어로 타블로(tableau)’는 영어로 ‘picture’이고, 미술 분야 우리말 번역은 통칭 그림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세 언어가 원어의 맥락이나 지역과 상관없이 회화와 사진에 혼재되어 쓰이고 있다. 게다가 지금처럼 사진이 동시대 미술의 전면으로 부각된 데는 독일 뒤셀도르프학파를 필두로 사진이 현대회화처럼 대형화, 스펙터클화, 정교화, 조형화한 힘이 크다. 앞서 본 연재에서 다룬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강홍구의 신안 바다 사진들도 그에 못지않다. 비교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 현대미술경향을 축으로 볼 때 둘의 사진 작업은 같은 미학적 속성에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중요한 맥락은 사진을 광학(디지털)기술에 의한 이미지 혹은 카메라라는 인공장치의 결과로 한정하는 대신, 그럼으로써 자꾸 사진의 중립성과 객관성에 대한 논쟁으로 힘을 빼는 대신, 예술로서 사진이 어떤 힘을 가져야 하는가이다.

 

카메라 나투라

강홍구의 신안 사진들에 대해 어떤 비평 언어를 부여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카메라 나투라(Camera Natura)’를 생각해냈다. 라틴어로 ‘camera’‘[사진의] 을 뜻한다는 사실은 롤랑 바르트의 명작 카레라 루시다 Camera Lucida를 통해 익숙할 것이다. 이에 출생, 자연, 본래, 천성, 본질 등을 뜻하는 ‘natura’를 더하면 좀 넓은 의미로 강홍구의 신안에 부합할 것 같다. 이를테면 태어난 곳, 육지와 먼 자연, 그리고 작가가 타블로를 통해 기억하고 싶고 새롭게 포착하고자 하는 본질적 공간으로서 자연 사진의 방말이다. 혹시 카메라 나투라를 나보다 먼저 쓴 경우는 없는지 구글링을 하니 동명의 스웨덴 잡지(www.cameranatura.se)가 검색된다. 자연사진 전문 잡지로서 북유럽의 소규모 출판사가 일 년에 네 번 발간하는데, 주로 장엄한 산 파노라마, 황량한 사막, 북유럽의 여름정원, 고대의 신비를 담은 숲등이 실린단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강홍구의 신안에서 주목한 카메라 나투라는 그런 범() 자연적인 피사체가 아니다. 자신의 뿌리였으나 이제는 상실한 곳, 그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위와 취향이 자라나온 자연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강홍구의 초기작 나는 누구인가?신안 바다-, 모래, 바람만 놓고 보면, 그 시각적 수준이나 미적 경험의 질 면에서 둘은 대극(對極) 같다. 그 사이에 강홍구 작가가 비판적 주제를 버리고 심미적 사진에 몰두했던 것일까? 한 때 스스로를 “B급 작가로 긍정했던 작가가 이제는 거장인 체하는 것일까? 이상한 답처럼 들리겠지만, 강홍구는 사진의 비/객관성을 전제로 그것을 주 매체로 써온 작가다. 또 회화의 시각질서를 자신의 창작 DNA로 습득했지만 그 순수미술의 경전을 자기 식으로 약화시켜온 미술가다. 여기에 결정적인 사실을 더하자면 지난 세월 동안 강홍구는 그린벨트, 드라마 세트, 오쇠리 풍경, 은평 뉴타운에 대한 어떤 기록, 사람의 집-프로세믹스 부산연작들을 통해서 한국의 리얼리티를 비판적으로 얇게 저미듯 주제화해왔다. 1960년대 군부정권시절의 개발논리부터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의 공간학(proxemics)까지, 드라마 제작을 위해 조성된 현실 장소부터 픽션보다 더 가상적인 재개발 폐허까지 말이다. 때문에 내가 보기에 강홍구는 사실상 사진과 회화의 타블로를 분리해 생각한 적이 없으며, 역으로 그저 단순한 눈요기로서 타블로를 제작한 적이 없다. 또 그는 주어진 피사체 없이 사진을 가공한 적이 없는 만큼이나 생각 없이 그림을 그려온 것 같지 않다.

옆에서 보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의미 있는 작품을 해내는 미술가가 있다. 그런 이의 작업은 언뜻 성글게 짠 그물에서 많은 것들이 빠져나가듯이, 의도든 아니든 핵심에서 슬며시 비껴난 것들이 이미지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호소력이 있다. 그래서 좀 더 오래, 깊이 들여다보면 그 미술가에게는 원하는 표적만 포획하고 나머지는 애초 자기 것이 아니라는 듯 권위를 털어내는 초연함과 자족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초연함과 자족성이 곧 자연스럽다. 감상자 입장에서는 그로 인해 느슨한 끌림과 멜랑콜리한 자극을 느끼고, 스펙터클에 박힌 어떤 갈고리를 찾아 해독하고 싶어지게 한다. 강홍구 작가와 그의 사진, 회화 작업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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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한 번의 붓질: 베르나르 프리츠 대담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한 번의 붓질: 베르나르 프리츠 대담

쿨투라 2022. 8월호.







CULTURA 2022. August. 갤러리-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한 번의 붓질: 베르나르 프리츠 대담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세계 톱 10 상업화랑 중 하나인 갤러리 페로탕은 파리에 본점을 두고 뉴욕, 도쿄, 홍콩, 상하이, 서울에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화려한 배경과 인맥을 자랑하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오직 예술가를 발굴하는 선구안과 비즈니스 능력만으로 입지전적 성공을 거둔 갤러리스트 에마뉘엘 페로탕이 대표다. 베르나르 프리츠는 그런 페로탕이 가장 존경하고 오랫동안 같이 일 해온 프랑스 현대 추상미술의 거장이다. 페로탕 서울에서는 68일부터 715일까지 마지막 회화 Les Dernières peintures라는 타이틀로 프리츠의 최신작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렸다. 2017년 개인전에 이은 두 번째 페로탕 서울 전시이고, 국내 관객에게는 2014년 부산 조현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포함해 총 세 번의 감상 기회 중 가장 프리츠 다우면서도 새로운 스타일의 추상화를 마주하는 귀한 자리였다.

필자는 세 번에 걸쳐 이뤄진 프리츠의 국내 개인전 모두에 미술평론을 쓴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는 모더니즘에서 컨템포러리아트까지를 관통해온 마스터로서의 원숙함과 취향과 태도 면에서 언제나 소년일 것 같은 청량함을 함께 갖춘 아티스트다. 그런 그가 나와의 대화에서 매번 독특한 예술적 영감을 제시하고, 자신의 회화에 관한 나의 미학적 해석과 비평에 적극적인 동의를 표한다. 거장으로서의 깊이와, 반면에 결코 자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개방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번 페로탕 서울 전시작들에서 예외 없이 프리츠의 그 같은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화가의 주관적 서사나 정서를 분출하는 식의 추상표현주의 대신 그리기의 조형 규칙과 프로토콜을 끊임없이 변주하는 개념적 회화 실험 자체가 핵심이다. 때문에 나는 이번 전시에 부친 글 시각, 청각, 촉각의 앙상블: 베르나르 프리츠의 45년 추상화에서 프리츠의 최근 그림이 감상자로 하여금 통합적 지각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를린 작업실에서 미리 내 글을 읽고 서울에 온 프리츠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 이해는 더 깊어졌다. 특히 우리의 대담은 베르나르 프리츠의 회화세계에서 미학적 본질에 속하는 표현 형식과 그만의 사유를 언어로 좀 더 풍부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모쪼록 프리츠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다채롭고 선명한 그의 미의식이 가닿기를 바라며 우리 대화의 일부를 여기 옮겨놓는다.

 

Repentir, Pentimento, 일필휘지

강수미(이하 SM): 2019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당신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나는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 전시 제목이 Bernard Frize: Sans Repentir, 번역하면 후회 없이또는 회개하지 않고. 이 제목은 여러 가지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나 작가만의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나의 해석을 먼저 말하자면, ‘Sans Repentir’는 한편으로 40년 이상의 예술가 경력을 쌓고 프랑스 현대회화를 대표하는 거장의 회고전에 맞는 매우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현으로 읽힌다. 다른 한편, 그 제목은 어떠한 규칙이나 억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규칙은 당신이 수십 년 동안 지켜온 추상화 창작의 규칙이 아닌가. 가령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화가의 주관성을 억제하기 위해 오히려 붓질을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해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퐁피두 회고전 제목인 후회 없이는 그러한 당신의 추상화 미학 원칙에 어떠한 아쉬움이나 회한도 없다는 뜻이 아닐까? 또 그 전시 제목을 회개하지 않고라는 관점에서 종교로 확장시켜 보면, 예술가로서 당신이 여태까지 종교적 규율이나 사회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지향하며 미술을 해왔다는 의미부여도 가능할 것 같다.

Bernard Frize(이하 BF): 당신이 미리 보내준 질문을 읽었다. 좋은 토론이 되리라 생각한다. 질문 관련해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이탈리아어 펜티멘토(pentimento)’. 사실 불어 르퐁티에(repentir)’를 영어 ‘repentance’로 옮기면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또한 퐁피두 전시 제목은 내가 아니라 미술관 큐레이터 안젤라 롱프가 정했다. 그 의미는 펜티멘토에 가까운데, 회화에서 화가가 한 번 그린 그림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그리는 경우를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피카소가 그렇게 많이 그렸다. 가령 팔을 그렸다가 지워버린 상태 같은 것이 보인다. 때문에 나의 퐁피두 전시 명인 르퐁티에 없이는 곧 지우고 다시 그리는 법 없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불어로 르퐁티에는 그렇게 펜티멘토같은 것인 동시에 상당히 종교적인 용어다. 회개를 내포하기에 좀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안젤라는 내 전시에 양가적인 의미를 내포한 개념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고, 그래서 르퐁티에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SM: 충분히 이해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해 같은 의미의 차원에 도달한 것 같다. 한 번 그린 그림을 수정하거나 덧칠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당신의 추상화는 일관된 형식미학을 구축했다.

 

BF: 덧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이탈리아어를 쓰고 싶은데 알라 프리마(alla prima)가 그것이다. ‘처음’, ‘한 번으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르퐁티에 없이는 다시 말해 한 번의 붓질이자 리터치 안 하기이고, 그런 맥락에서 당신이 내 작업 방식에서 일회적인 붓질의 반복을 지목한 것은 옳다.

 

SM: 당신이 말한 이탈리아의 펜티멘토문화와 한국의 서예문화 사이에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리에게는 한자로 일필휘지(一筆揮之)’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뜻이 펜티멘토처럼 한 번에 한 획으로 끝남을 의미하고 수정하거나 덧칠하지 않는 태도를 긍정하는 데 있다. 게다가 내 생각에 두 단어는 한 번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함의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 점에서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모두 상통하지 않을까.

 

BF: 매우 근접한 것 같다.

 

 

작품명, 랜덤 액세스, 자유

SM: 두 번째 질문도 제목과 연관된다. 내가 이번에 쓴 글에서 논했듯이 당신의 최신 작품들은 이전과 다른 형식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형식적 아름다움은 우리의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미학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내가 당신의 2022년 그림들에 대해 시각, 청각, 촉각의 앙상블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그렇다. 그런데 그 그림들 각각에는 ‘Silus’, ‘Apa’, ‘Sabo’, ‘Kova’, ‘Ader’ 제목이 부여됐다. 그 제목들의 의미를 말해줄 수 있는가? 나는 그 제목들이 사람의 이름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고, 게임 속 캐릭터나 상품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해당 그림들을 보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 안에서는 그 그림들을 감상하는 일과 그림의 제목들을 유추하는 일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평행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나는 그 작품의 제목에 그림의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춰서 해석하지 않았다. 또한 반대로 그림에서 본 것을 즉자적인 언어로 주석 다는 일 없이 당신의 작품에 관한 글을 썼다. 그 시간은 내 사고의 고정관념을 자유롭게 풀어헤쳐 다양한 의미를 상상하는 과정이었다. 동시에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소리를 듣고, 질감을 피부로 느끼는 것 같은 감각적 순간이었다. 마치 언어적 의미를 포옹한 채 그 너머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면 좋겠다. 내가 이번에 쓴 글 말미에 프리츠의 추상화를 감상할 당신에게...‘그림을 본다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것을권한 이유가 거기 있다.

 

BF: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결코 작품에 특별한 제목을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 베를린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이전 파리 스튜디오에서부터 그림의 제목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서 명명했다. 당시 스튜디오 조수가 나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면서 각각의 작품에 부여할 이름을 컴퓨터에서 추출해 기입해 넣은 것이다.

 

SM: 이는 당신의 최근 작업에서도 매우 중요한 성격이 아닌가?!

 

BF: 그래서 매번 조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제목을 찾아주기 바라. 단순히 문자를 조합한 이름을 부탁하네. 듣기에 좋으면서 짧은 것일수록 좋아.”라고 말했다. 그렇게 찾은 작품 제목에는 이름도 있고 숫자도 있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분류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SM: 랜덤 액세스라고 봐도 될까?

 

BF: 그렇다. 무작위다. 내 그림의 제목은 특별한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나조차 모른다. 그것은 다분히 유희적이다.

 

SM: 맞다. 정말 유희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름 짓는 방식은 사실상 당신이 당신의 그림에서 화가의 의도나 주관성을 배제하려는 실험과 연관된 태도라고 생각한다.

 

BF: 정확하다. 내 작품의 제목이 어떠한 시적인 함의도 없도록 하는 이유다.

 

SM: 당신은 1970년대부터 이미 예술가의 주관이나 습관적 표현을 배제한 추상화를 탐구했다. 독일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1960년대부터 사진을 기반으로 한 회화, 리얼리즘적 추상회화를 시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점에서 나는 당신의 회화세계가 역설적인 의미에서 화가의 능동적 창작, 기존 미학에서 자유로운 표현방식, 인간 중심적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적 사유라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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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 지상에서 아트를 by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 지상에서 아트를

쿨투라  2022. 7월호.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 지상에서 아트를!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어떤 예술작품은 감상자에게 환호와 두려움을 동시에 안긴다. 막대한 자본이 투여된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최첨단 과학기술과 감각지각 장치가 총동원된 스펙터클 영화나 대규모 미디어아트 전시가 그러하다. 인공지능, 로봇, 빅데이터, 알고리즘,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현란한 동시대 기술력이 당장의 촉각적 열광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만큼이나 기술의 강력한 힘에 밀린 관객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 힘이 평범한 사람들의 상투적 사고방식에 부담을 주고, 습관적으로 행해온 경험의 경로를 찢고 흔들기 때문이다. ‘현대미술 전시장하면 네모난 하얀 벽과 밝은 빛으로 감싸인 화이트큐브(white-cube) 공간이 떠오른다. 하지만 컨템포러리 미디어아트는 영화관처럼 대개 닫힌 구조이고 암흑의 블랙박스(black-box) 전시장에서 선보인다. 때문에 거대한 스크린들과 강력한 사운드가 휘몰아치는 몰입형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쏟아지는 시청각 자극에 빠져 황홀경을 느낄 가능성이 커진다. 따닥따닥 붙은 의자에 모여앉아 2~3시간 반강제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관과는 달리 언제든 이동할 수 있고, 심지어 초대형 쿠션에 누워 감상하는 독특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관객은 이 하이엔드 미디어아트 이미지들이 자신이 결코 알 수 없는 차원의 기술력과 인간 역량의 합작, 앞서기는커녕 뒤따르기에도 벅찬 거대하고 치밀하며 거스를 수 없는 사회적 대세의 가시화임을 자각한다. 그 순간 뒤처짐에 대한 공포(FOMO; Fear of Missing Out)가 밀려온다. 또 자신을 빼고 전개되는 비가시적이고 닿을 수 없는 막강한 사회 진보에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현대미술계의 미디어아트 중에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한껏 이용해 제작하되, 관련 이슈에 대한 밀도 높은 조사 연구를 바탕으로 비판적이고 통찰적인 내용을 담는 데 성공한다. 그런 작품에 특화된 관객에게 아트는 슈거파우더 뿌린 힐링이 아니다. 현실에서 느껴온 미래에 대한 두려움, 기술의 추월이 유발하는 압박감, 무지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런 부정적 감정을 딛고, 작품을 통해 실제 삶과는 다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가시성과 가독성이 생긴 쟁점을 눈앞의 스펙터클 속에서 분별하고 채굴해낼 수 있게 한다. 이에 관해서는 독일의 현대 미술가이자 영화감독이고, 비평가이며 이론가인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1966년생인 그녀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예술, 사회학, 철학, 정치학, 미디어이론을 횡단하는 학술적이고 비평적인 글을 써왔다. 국내 번역된 스크린의 추방자들, 면세미술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 번역된 주요 저서만 해도 여러 권이다. 그런 슈타이얼이기에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그녀의 가장 큰 성과 또한 이론적으로 엄격하고 가치 높은 내용을 미디어아트 형식으로 독특하고 뛰어나게 구현해냈다는 사실이다. 2022년 현재 그녀의 명성은 독일의 문화예술계를 넘어 글로벌 아트신의 최고점에 도달했다.

 

데이터의 바다를 비판의 지상 위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작가로서 슈타이얼을 초청해 아시아 최초 대규모 개인전을 기획한 사실이 작가의 위상과 중요성을 말해준다.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Hito Steyerl-A Sea of Data(5.27-7.17)가 바로 그 전시다. 1990년대 초기작 범주인 다큐멘터리 방식의 필름 에세이 <독일과 정체성>(1994)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위촉한 신작인 4채널 비디오 설치작품 <야성적 충동>(2022)까지 총 23점이 집결함으로써 회고전에 버금가는 수준이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지하 12, 3, 4 전시실 및 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전시가 펼쳐지고, 그에 더해 MMCA 필름앤비디오에서는 전시 연계 특별상영이 이어진다. 전시 출품작의 양적 규모뿐만 아니라 각 작품의 형식적 차원 및 내용의 밀도가 워낙 넓고 깊고 복잡하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많은 시간과 지적, 감각적 에너지를 투여할 필요가 있다.

그럴만한 가치가 차고 넘친다는 점을 이 짧은 글에서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슈타이얼의 거의 모든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비슷한 의미의 강도와 표현의 종합성을 갖기에 작품을 선택적으로 보는 일도 그리 좋지는 않다. 그래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을 꼽는다면 <소셜심>(2020), <면세미술>(2015), <태양의 공장>(2015), <야성적 충동>(2022)이다. 이 작품들은 제작 시기도 다르고 작품의 형식과 내용 모두 개별적이다. 그러나 슈타이얼 특유의 냉정한 현실 통찰력이 작품의 기본 내러티브를 이루고, 그 내용에 부응하는 기술적 매체 및 프레젠테이션 방법론을 구사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가령 팬데믹 동안 전 세계인의 일상을 장악한 온라인 매체 환경, 디지털 시뮬레이션 행동방식과 상호작용에 관한 5채널 영상 <소셜심>을 보자. 이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검은 방 구조의 영상설치작품은 2020년 일어난 군중 시위, 경찰 진압, 희생자 등의 데이터 연산과 AI 분석 값을 게임 속 가상 경찰과 군인 캐릭터들의 춤으로 실시간 시청각화 한다. 관객은 그 깜깜한 공간과 현란한 이미지 스크린이 지배하는 작품 앞에서 기이하게도 짐볼에 올라타 뒤뚱거리며 작품을 보게 된다. 마치 영상 속 멍청해 보이는 몸집의 경찰이나 뻣뻣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군인이 그러듯이. 슈타이얼의 미디어아트작품이 탁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녀는 기술과 미디어 조건이 변화하는 와중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훈육되는 삶의 국면과 어색하고 부조리함에도 좇게 되는 주도적 시스템을 보고 인식할 수 있게 작품화한다. 그것도 어설픈 인문학이나 반()기술의 담론으로 그럴듯하게 명분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반()사회적 효과와 균형이 깨진 힘의 위험을 정확히 모방하며 비판하는 이해력, 기술력, 표현력 삼박자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미적으로는 새로운 조형언어, 지적으로는 날 섰지만 정교하고 풍부한 담론가능성, 기술적으로는 최첨단 수준이며 동시에 그 자체를 저격하는 실험주의. 이 점이 현대미술 중 슈타이얼의 작업이 가장 의미심장한 예술로서 존중 받아야 하는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 제목으로 채택한 데이터의 바다는 슈타이얼이 2016e-flux 저널에 발표한 논문 데이터의 바다: 아포페니아와 패턴()인식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 작가가 수십 년의 연구 및 창작에서 끈질기게 문제시하고 있는 특정 세계를 명시한다. 요컨대 동시대 우리 현실 자체.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생산물, 빅데이터 환경과 기술공학적 질서의 결과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물고기처럼 자연스럽게 헤엄치거나 심연으로 처박히거나 하고 있는 삶의 현장. 문제는 슈타이얼이 글의 부제로 쓴 아포페니아와 패턴()인식이 표적 삼듯, 엉터리이거나 악의적인 데이터 해석, 남용, 구성, 재구성 등으로 세계를 오인하는 것이다. 반면 그녀의 미디어아트는 그 오인의 패턴을 지상의 현대미술로 깨뜨리면서 세계 인식에 기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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